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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 그것은 아름다운 신명이었다

붉은색 하나로 자발적 통합 실현시킨 붉은 악마
집단 감흥의 응원문화 창출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렇지만 한국은 이미 여러 외신들이 외쳐대듯이 세계 축구역사의 새로운 장을 창조한 주역이 되어버렸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월드컵 붐이 과연 조성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라고 하는 느낌이 쉽게 다가오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월드컵을 냉정하게 대했다. 지금까지 월드컵을 개최해온 국가들이 월드컵으로 인하여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새로운 통합과 발전을 이루어온 사례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월드컵은 불안하기만 했다.

입장권과 월드컵 응원용품 판매로부터 일상 생활에서의 사소한 이야깃거리에 이르기까지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의 흥미는 일본인들의 그것보다도 못하였으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우보다도 처지는 편이었다.

지출되어진 막대한 투자에 비해 획득되어질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의 산출이 너무나도 어둡게만 보였던 상태였다.

그러나 막상 월드컵 개막 직전 가졌던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두 차례에 걸친 평가전을 거치면서 우리의 월드컵 열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월드컵 1승, 나아가 16강 진출이라고 하는 역사적 쾌거의 가능성으로 연결되어져 지금까지의 불안을 불식시키는 출발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40만 명으로부터 시작된 길거리 응원은 독일과의 4강전을 통해 급기야 7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대한민국 전체 국민이 어우러져 하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되어 붉은 악마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의 선전을 기원하는 축제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서 나아가 함께 되어지게 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우리가 얻게 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부분을 살펴보기 위하여 다음의 두 가지 측면으로부터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과 정신, 이중적 가치관의 변화

첫 번째는 1980년대 이후 이루어져 온 한국의 역사적 과정이다. 해방이후 지속되어온 다양한 차원에서의 독재정권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열망의 참여와 소련 붕괴와 동서독 통일로 촉발되어진 세계적 차원에서의 동서 이데올로기 종식으로 인하여 그 막을 내리고, 한국사회는 이제 민주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적 장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동안 강력한 사회통제의 방편으로 활용되어 온 군사독재와 남북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약화되어졌으며, 사람들은 개인의 소비와 자유에 더 많은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정치보다는 문화가, 가족보다는 개인이 더욱 강조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잘못 끼워진 한국사회의 첫 단추는 곧 성수대교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급기야 1997년도의 외환위기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곪아왔던 환부가 드디어 터져버린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는 한국인의 올바른 정체성 및 가치관 함양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인들로 하여금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간, 그리고 정신주의와 물질주의간에서 혼란스러움과 갈등을 경험하게 하였는데 예를 들면, 과거에는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 그의 집안과 가문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철저히 개인을 위한 것으로 변화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와 같은 개인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인으로써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은 집단주의적 연계망이 지속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등 일련의 이중적인 태도와 가치관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에 따라 아이들간의 친구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현상,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모나 자녀를 다양한 방식으로 버리기까지 하는 현상 등이 증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 가치관에 입각한 효 사상과 가족주의의 강조 등과 같은 정신주의적 측면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등 물질주의의 강화와 정신주의의 지속간의 이중성이 쉽게 확인되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국사회에 급속도로 보편화되어진 인터넷 망의 확산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있어 컴퓨터와 핸드폰 등과 같은 정보화 기기들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특히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 계층에서는 게임중독에 걸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게임에서 사용되는 무기들을 현실공간에서 협박, 폭력 등을 동원하여 빼앗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으며, 심지어 가상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환각증세로 말미암아 마치 게임을 하듯 현실 속에서 타인을 살해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공동체적 힘 보여준 응집력

그러나, 한국인의 저력은 여기에서 소멸되지 않았다. 전통적 신명의식에 기반을 둔 한국인의 위기극복의식은 이 시기부터 다시 작동되기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현대적 특징과 전통 문화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움직임, 그리고 이로부터 한국적인 무엇인가를 살려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확산시키고자 하는 밑으로부터의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 각종 시민단체의 활성화, 다양한 대안학교의 출현 등이 새로운 사회적 활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붉은악마도 그 역사적 의미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8년의 프랑스 월드컵은 이와 같은 새로운 노력들에 힘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하지 못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그 바통을 넘겨주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일 월드컵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두 번째 사실로 접어들게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카임(E. Durkheim)은 ‘집단 감흥(effervescenc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 집단을 이루며 열광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치 물에 용해되는 비타민 C를 유리컵에 담긴 물에 떨어뜨리면 그 순간부터 비타민은 거품을 내며 물 속으로 점차 용해되어 결국 흔적도 없이 물과 하나가 되어지는 현상(이 경우 물은 비타민 c의 촉매제가 된 것임)이나 흩어져 있는 모래알들이 철판 위에서 열을 받으면 녹아서 단단한 유리가 되는 것과 같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도 어느 순간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촉매를 만나게 되면 강력한 집단 감흥에 빠지게 되고 이어서 곧 떨어지지 않는 강한 응집력의 새로운 공동체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한일 월드컵의 의미를 현시점에서 보다 명확하게 조명하게 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동안 어려움에 빠져온 한국인들에게 있어 2002 한일 월드컵은 중요한 ‘집단 감흥’의 촉매제가 된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로 하여금 월드컵을 통해 붉은 색 하나로 자발적인 통합을 실현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공해준 붉은악마의 응원문화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한국축구대표팀이 선전해주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열정적이고 역사적인 한국의 축제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월드컵에 대한 관심조차 생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붉은악마 응원문화가 1997년부터 지속적으로 지향해오고 있는 ‘온라인(on-line), 오프라인(off-line)을 중심으로 한 사이버 공동체’, ‘응원집단의 체계적 조직화’, ‘민주적 운영’, ‘비폭력적 응원문화’, ‘재정의 비종속성’, ‘응원문화의 문화운동화’ 등과 같은 특성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사회의 집단 감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결국 월드컵의 개최, 축구대표팀의 선전 등과 어우러져 한국사회의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행적ㆍ자발적 역량 떨쳐

자생적이며, 자발적이고, 대단히 조직적이며, 전국규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상공동체적이며 민주적이라는 점 등 기존의 응원집단이 지니고 있지 않은 붉은악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급격한 문화변동의 한 시점에서 출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급진적 변화로부터 출현하고 있는 가치관 갈등 및 문화변동의 방향성 혼란 등과 같은 제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연한다면, 문화변동을 담고 있는 여러 사회적 영역에서의 미흡한 부분들이 2002 한일 월드컵을 매개체로 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응원문화의 확립과 그 내재적 가치의 사회적 활성화로 인하여 90년대 이후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의 문화변동 방향성 설정에 있어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간의 조화 가능성, 정신주의와 물질주의간의 조화 가능성, 한국중심주의와 세계화간의 조화 가능성,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간의 조화 가능성 등이 붉은악마의 응원문화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이며 나아가 붉은악마 응원문화가 세계적 모델로 위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한국은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었다. 세계의 어느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신화를 이루었으며, 이 신화는 앞으로 또 다시 지속될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빛을 발휘할 것이다. 월드컵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대표팀의 선전만도 아니며 붉은악마 거리응원만도 아니다. 그것은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하나가 된 사실 그 하나에 이미 모두 녹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잠재되어 왔던 한국인의 역량이 발휘되어지는 바로 이 순간에 그 의미는 다시 한 번 튀어 올라 세계의 함성을 들을 것이다.

최원기 한국청소년개발원 연구위원

입력시간 2002/07/0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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