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대한민국에 희망을 심어준 승부사

영원한 우상으로 깊게 각인, 탁월한 리더십으로 신화 이끌어

각본 없는 월드컵 드라마의 성대한 막이 내려졌다. 그 환희와 감동의 잔영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서 생생히 메아리 친다. 특히 태극 전사들의 불굴의 투지와 명장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은 이땅에 월드컵이 계속되는 한 우리 민족의 뇌리 속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거스 히딩크(56).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선수들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한국 국민과 선수들에게 부담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4년이 흐른 지금, 그는 한국 국민의 영원한 우상으로 거듭났다.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국팀의 기적적인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며 한반도를 ‘히딩크 신드롬’으로 휩싸이게 만들었다.

지금 전국에선 히딩크의 탁월한 리더십과 팀 운영 전략을 벤치마킹 하자는 목소리가 물결치고 있다. 4년 전 그가 우리에게 안겼던 0-5의 아픈 상처가 이제 새 살로 돋아 나 더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국축구 빛낸 실용주의 철학

벽안의 외국인 히딩크에 열광하는 이유는 대표팀을 이끌면서 그가 보여준 올곧은 그 만의 철학에 기인한다. 히딩크는 우선 한국 사회의 고질적 관행이었던 학연, 혈연, 지연을 철저히 배제한 실력 위주의 선수 선발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스타와 무명을 가리지 않고 실력과 자질에 따라 선수들을 선발한 뒤 그들 간의 치열한 주전 경쟁을 유도, 전체 전력을 끌어 올렸다. 경기 도중에는 선배에게도 경어가 아닌 이름을 부르게 함으로써 개인보다는 조직을 우선토록 했다.

재능은 있지만 게으른 스타보다 근성있고 부지런한 무명들에게 더 눈길을 주었다. 김태영 최진철 이영표 김남일 박지성 같은 흙 속의 진주들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도 히딩크 였기에 가능했다.

히딩크는 주위 비판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축구 철학과 스타일에 따라 선수들과 대표팀의 컬러를 서서히 바꿔 나갔다.

국내 정치권과 경제계가 주목하고 있는 ‘히딩크 배우기’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학연, 지연, 혈연, 연고주의라는 고질적인 병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깝게는 월드컵 기간 중에 치러진 6ㆍ13 지방선거에서도 이 폐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요즘 경제계에서는 연공서열을 파괴한 능력 위주의 히딩크식 인재 선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은 임원들에게 히딩크 리더십을 배우라고 지시했고, 삼성 그룹 주요 계열사도 ‘히딩크에게 배우는 리더십’이라는 프로그램을 사내 방송했다.

금융업계에서도 히딩크식 조직 관리를 시행할 계획이다.


히딩크식 리더십에는 ‘독창적 창조를 통한 조화’라는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간 한국 축구는 유럽식 힘의 축구도, 남미식 개인 축구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런 한국 축구를 강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해 시종 상대를 압박하는 ‘한국식 조직 축구’를 새로 탄생 시켰다. 우리 대표팀이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축구의 최고 팀들을 연파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한국식 축구를 한 덕택이다.

히딩크는 주어진 조건 내에서 조직원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린 뒤 이를 조화시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부족한 자원으로 치열한 세계 경제 전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런 히딩크의 리더십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히딩크는 “처음 팀을 맡았을 때 한국 선수들은 네덜란드 선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열심히 축구를 익혔고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며 “여러 팀 감독을 맡아봤지만 한국 팀처럼 보람 있었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선수와 감독간의 신뢰로 잠재력 극대화

‘준비는 철저히, 그러나 실전에서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하는’ 치밀함과 유연성의 조화도 히딩크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히딩크는 유럽 징크스에 빠져 있는 선수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주변에서 히딩크호에 회의적 시각을 보내는 것에 개의치 않고 체력을 강화하는 파워 프로그램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그러면서도 히딩크는 주변의 충고와 조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선수 개개인을 잘 아는 박항서 코치를 곁에 두고 선수들의 고충을 수시로 체크 했다.

히딩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어퍼커트 골 세리머니에는 ‘장하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그것을 해냈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프타임 때 선수들의 얼굴을 감싸거나, 경기 후 관중들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히딩크의 쇼맨십도 선수에 대한 신뢰와 관중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히딩크는 이처럼 선수 개개인의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보고 이것을 철저하게 팀 워크로 활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철저한 권한 부여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분명히 한 것도 히딩크가 보여준 모범적인 사례의 하나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 때마다 히딩크는 항상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의 경기에 만족한다’며 모든 공을 선수들에게 돌렸다.

이처럼 히딩크는 자신의 스타일로 키운 선수들을 믿고, 그 결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는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사회학과)는 “히딩크 리더십은 연고주의를 벗어난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선수 선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프로그램 도입, 개인의 헌신성을 강조하는 강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압축된다”며 “히딩크 리더십은 우리사회의 발전을 막는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면 우리도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준 쾌거”라고 설명했다.

이제 월드컵은 끝났다. 하지만 히딩크가 보여준 희망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영원히 문화적 충격으로 계속될 것이다.

송영웅 기자

입력시간 2002/07/0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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