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 파괴, 무정형의 축구

창조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공격축구, 싱킹사커로 경기 지배

한국축구는 달라졌다. 아니 세계 정상급으로 당당하게 인정 받았다. 세계언론도 한국팀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는 세계축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체력에 지나치게 의존, 단기 성과를 내기엔 알맞지만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다”는 일부 비판론자들도 있지만, 한국축구의 달라진 모습을 부인하진 않는다.


사라진 로봇축구

한국축구가 창조성 없는 ‘로봇축구’라고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1년 전과 비교할 때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국축구는 무엇이 달라졌으며 왜 세계수준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 후 축구 국가 대표팀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찾아 보면 나온다.

우선 선수들이 통통 튄다.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뭔가 일궈내겠다는 자신감으로 뭉쳐있다. 특히 송종국 이천수 박지성 김남일 등 젊은 선수들은 히딩크가 ‘오대영’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어 휘청거릴 때도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과거 언론이나 팬의 기대가 너무 앞서간다고 불평을 터뜨린 것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 같은 자신감은 그라운드에 그대로 투영됐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서두르지 않고 완급을 조절하며 역습 기회를 노렸고 끝내 대역전 드라마를 일궈냈다.

자신감은 일단 강한 체력에서 나온 것 같다. 히딩크가 월드컵 개막을 3개월 남짓 남겨두고 연패를 당하는 수세 국면서도 미련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실시한 체력훈련이 주효했다.

달리고 넘어지고 밀어붙이는 육박전 같은 경기에서 체력은 핵심이다. 우리는 그 동안 화려함은 찾으면서도 이 평범한 사실을 경시해왔던 것이다. 우리 선수들은 이제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90분을 완벽하게 소화할 능력을 갖게 됐다.

자신감은 축구의 기본인 정확한 패스로 표출됐다. TV자막을 통해 시청자들도 보았겠지만 한국의 패스성공률은 늘 70% 이상을 기록했고 상대를 압도했다. 히딩크의 “경기를 지배함으로써 승리한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과거 한국축구의 특징은 ‘스피드와 전진’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선수들은 공을 잡았을 때 자신이 돌파를 시도하거나 긴 전진패스를 주로 사용한다. 백 패스를 지양하고 무모한 공격을 반복함으로써 한국축구는 ‘뻥 축구’ ‘선수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창조성 없는 축구’라는 비판을 들었다.


성공률 높아진 패스

그러나 히딩크는 성공확률이 낮은 무지막지한 전진패스를 금지했다. 전진이 안되면 오히려 백 패스를 하도록 주문했다. 빠르고 짧으며 성공률 높은 패스로 경기를 지배하고 찬스를 살려나가도록 했다.

한국축구는 그림과 같이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정확한 2, 3번의 패스로 공격 침투가 가능해졌다. 우리 대표팀이 미드필드에서 재빠르게 공격으로 전환하는 패스에 유럽이 당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빠르고 정확한 패스가 이루어지는 것은 수비와 공격의 3선 라인이 좁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좌우, 상하의 균형유지는 상대의 기습공격을 차단하는 한편, 빨리 역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스페인전서 고전한 것은 바로 미드필드와 공격ㆍ수비수 간의 간격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탈리아전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공수전환 때 간격을 유지하면서 흔들림 없는 전진 수비로 상대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처럼 유상철과 박지성이 이동할 때 최진철 송종국이 함께 따라 붙으면서 전진하는 형태이다.

히딩크는 정확한 패스를 위해 선수들 간의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그가 선수단에 통용됐던 ‘형’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이 어린 이천수가 형이라고 부르면 아마 나머지 10명이 되돌아 보며 리듬을 잃지 않겠는가. 이천수는 황선홍을 ‘황선홍!’이라고 불러야 했다.

히딩크는 또 패스를 하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뒤에 상대수비가 붙으면 뒤나 옆으로 리턴 패스를, 없을 때는 스스로 돌파하도록’ 주문했다. 지금 우리 선수들이 공을 받아서 돌아나가는 동작은 세계수준의 선수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과거 한국 선수들은 모두 공을 보고 패스를 해 성공률이 낮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고 경기의 상황을 파악한 뒤 패스를 함으로써 성공률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선수들이 포지션별 임무를 명확히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이전과 달리 수비수나 미드필더들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행동하는 일이 사라졌다. 히딩크 부임 초기에 성적이 나빴던 원인은 선수들이 포지션별 임무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선수가 멀티플레이어로 변신

히딩크는 그러나 포지션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선수들은 항상 자신의 임무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을 요구 받았다. 경기 중 벌어지는 온갖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려면 포지션 파괴를 통한 능동적 전술변화가 필요했다.

모든 선수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다. 히딩크가 경기의 고비마다 수비수를 왕창 빼고 공격수들을 투입, 무리수를 던지고도 추가 실점을 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수석코치 펨 베어백은 이를 ‘무정형(無定型)의 축구’라고 말했다.

전술의 변화를 통해 선수들은 효율적으로 뛰는 법을 배웠다. 미친 듯이 무작정 달린다고 골이 터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풀에 지치기 일쑤이다. 달려야 할 때 달리고, 쉴 때는 쉬어야 한다. 여기에 본선 32개국 중 최고를 자랑하는 체력까지 가미돼 우리 선수들은 수비에서 최전방 공격까지 간격을 아주 좁게 유지하면서 강한 압박으로 축구 강국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물론 우리가 세계수준에 부족한 점도 있다. 바로 공격지역에서 개인 능력이다. 안정환이나 설기현, 이천수 등 우리 스트라이커들은 상대 수비수와 1대1로 맞섰을 때 스스로 찬스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독일전 패인도 사실 따지고 보면 스트라이커들이 결정적인 기회를 점수로 연결하지 못했고, 측면돌파를 통해 기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딩크 지도방식 계승ㆍ발전시켜야

결국 한국축구의 변화는 선수들이 지금까지 가졌던 나쁜 습관을 버리게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길었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축구의 변화는 3월 27일 유럽전지 훈련 중 가진 터키와의 평가전이 시발점이 됐다. 이후 엄청난 가속이 붙었다. 히딩크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그만큼 우리 선수들의 잠재력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히딩크의 지도방법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히딩크 축구. 그것은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예측 못했던 ‘히든 사커’였다.

김희태 명지대 감독

입력시간 2002/07/0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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