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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조선시대 전통무예 맥 잇는 김영호

[인간탐구] 조선시대 전통무예 맥 잇는 김영호

 선조들의 칼사위는 과학입니다

소리없이 바람을 가른다. 진검이 손에 쥐어있다. 고요하지만 민첩하게 한 사나이가 검과 함께 평원을 누빈다.

“우리 선조들의 검법은 그 움직임이 아주 과학적입니다. 상하좌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법이 없이 각 상황마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를 칠 수 있도록 상대의 허를 이용한 계산된 자세로 이뤄져 있습니다. 훈련을 오래 하다 보면 겨루기를 하지 않아도 상대의 빈 틈이 저절로 보일 만큼 감각이 길러집니다.”

전통 무예인 김영호(40). 편안한 인상과는 달리 10여년간 무술로 몸이 단련된, 만만찮은 검객이다. 그가 선보이는 것은 24반 무예, 조선시대 무인들이 필수적으로 익혔던 고유의 기예다. 전통 무예 중에서도 권법은 물론 발과 다리, 창과 칼 등 각종 무기를 이용한 기술까지 총망라 돼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철저 방비가 가능한 전방위 전법이다. “외형상 상대의 상황이 나보다 유리해보인다고 진짜 유리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대의 칼이 내 손보다 위에 있더라도 내가 아래에서 올려 치면 내가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응하는 자신의 능력과 선택이지요.”김씨의 고향은 거창이다. 지역 씨름대회에 나가 상을 탈만큼 운동을 좋아하고 건장한 아버지, 동생 또한 학교 씨름선수로 활동할 만큼 가족 대부분이 체격 건장한 운동체질 집안이다.


화가의 꿈 접고 운동ㆍ무예에 관심

그러나 유독 예외처럼 몸이 작고 여린 김씨에게 오히려 이것이 콤플렉스가 되었다. 고교 때까지도 화가를 꿈꾸었던 그가 한편으론 운동과 무예에 유난히 관심을 보였던 것도 아마 그 반동작용 같은 것일지 모른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기독교농민상담소 활동에 이어 한 출판 인쇄 관련 기획사에서 약 1년간 일했다. 24반 무예를 처음 알게 된 그 무렵이었다. ‘빗자루도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철저하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수련 시킨 민족무예 복원자 임동규씨의 월간지 인터뷰 기사며 저서 ‘한국의 전통무예’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

책에 나온 전화번호를 보고 무작정 임씨에게 전화를 걸어 첫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회사에 보름간 휴가를 얻어 지리산 한 토굴로 들어가 자신에게 산재한 여러 문제들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토굴에서 나온 김씨는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사표를 제출, 짐을 싸서 전라도 광주에 머물고 있던 임씨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거창한 무예인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잡기 위한 심기일전의 전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을 버린 채 찾아간 도장은 생각보다 암담했다. 회원다운 회원이라 부를 수 있는 제자는 단 한 명. 그나마 검도부 출신으로 몸이 잘 단련된 어린 남학생 두엇이 일취월장의 실력으로 스승으로부터 무예를 사사하고 있었다.

스승은 스승대로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쳐 온전히 도장만을 추스릴 형편이 못 되었다. 스승조차 막노동으로 생활을 해결하며 근근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무예’라는 말 자체조차 낯설만큼 전통무예가 알려지지 않은 때라 배우려는 사람도, 끈기 있게 버티는 사람도, 도장의 운영도 어느 하나 여의치 않았다. 스승 임씨의 가르침 역시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두 번 시범을 보이고는 가타부타 설명도 생략한 채 스스로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스승. 개중 다행이라면 이름 그대로 그림과 설명으로 쓰여진 무예도보통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막노동 하며 부부가 수련생활

기한도 정한 바 없이 수련 생활에 뛰어들었으나 갓 결혼한 아내까지 있었다. 아예 부인도 함께 무예를 배우며 신혼을 보냈다. 대책 없는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역시 틈틈이 막노동 등으로 돈을 벌며 수련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서 회의가 찾아왔다. 무예는 좋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1991년 대구로 옮겨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무예 수련의 끈은 놓지 않았다.

매일 새벽마다 앞산에 나가 구보를 한 뒤 검술을 연습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퇴근 후에도 다시 같은 곳에서 같은 훈련을 반복했다.

오랜 시간이 쌓여가던 어느날 자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몸놀림이 눈에 띄게 가볍고 민첩해져 있었다. 24반 무예의 힘과 혼이 피부로 느껴졌다.

주위의 조언과 자신의 확신 속에 1992년 ‘우리무예연구회’를 만들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우리 무예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수련자 7명이 함께 했다.

그 해 첫 발표회를 열었을 때 곧바로 지역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당장 이를 배우고 싶다는 신청자들의 전화가 연구회에 폭주했다. 얼마 뒤엔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회원들이 가입해 결국 전문수련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다소 학술적인 내용의 ‘민족무예회보’도 꾸준히 펴냈다. 민족무예의 열기는 순식간에 전국 곳곳으로 퍼져, 대학마다 관련 동아리가 결성되는가 하면 특히 서울에서 폭발적인 호응이 나타났다. 전국 22개 지부, 약 100개에 가까운 대학동아리, 배출한 사범만 200여명에 이르렀다.

1995년 가야산 무예학교를 이끌었던 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폐교를 빌려 전문수련장을 열었었다.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치며 가슴 뿌듯한 3년을 보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가 들이 닥쳤다. 어렵게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져내렸다. 회원수가 급격히 줄었고, 생활문제에 부닥친 사범들도 하나 둘 살 길을 찾아 떠났다. 그토록 어렵게 복원한 24반 무예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까지 봉착했다.

정통 무예학교를 세우려던 김씨의 다부진 꿈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10년 동안 전력으로 공들여 온 일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걸 보는 기분이란 뭐라 말할 수가 없지요. 생계도 어렵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까지 가는데 만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지난 12년 동안 이사만 12번을 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가진 돈까지 계속 까먹다 보니 늘 더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하는 이사였지요. 만약 무예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저도 진작 떠났을지 모릅니다.”


24반 무예 체계적 정리에 나서

2년간 고령에서의 지도생활을 거쳐, 지난해 2월 실력파 선발사범 4명을 이끌고 수원으로 올라왔다. 민족무예의 재기를 위한 새로운 출사표다.

현재 전국에 자리한 10여 개의 지부와 사범들의 선봉에서 김씨는 각종 행사와 학술세미나 등 24반 무예를 알리는 왕성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고집과 인내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최근 발표한 ‘조선시대의 협객, 백동수’라는 저서에서다. 김씨가 일대기를 조명하면서 세상에 드러난 주인공 백동수는 29세 때 무과에 급제해 45세 때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 초관에 임명된 후 정조의 특명으로 ‘무예도보통지’편찬 총감독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무인이다.

북학파 탄생의 숨은 산파이자 정조대왕과 많은 선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문무를 겸비한 남다른 지식인이었다. 특히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상 아픔 속에서도 평생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살았던 행적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역사에 철저히 가려져있던 이 조선의 거인을 세상에 알리기까지 김씨는 무예 연마 못지않은 끈기와 인내를 거쳤다. 백동수라는 이름을 처음 본 것은 1990년, 스승의 책에 잠깐 스쳐 지나는 이 이름을 가슴에 담은 후, 수년간 끈질기게 그 그림자를 좇았다.

처음 얻은 기본자료는 한 박사학위논문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반 페이지짜리 글이 전부였다. 그나마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풍부한’ 분량이었다. 그것이 초고 약 2,000매로 쓰여지게 될 때까지 마치 조각그림을 짜맞추듯 하나하나 김씨 손으로 온갖 사서들과 고전 문집들을 들추며 꼼꼼히 단서를 찾고 서로 접합해내는 일들이 이어졌다.

“완전히 탐정 같았지요. 고3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고전,사서, 각 관련 인물에 관한 연구논문, 상세지도, 군지(郡誌) 등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은 다 뒤져 읽었습니다.

뭣보다 어려웠던 건 대부분 한문으로 쓰인 책들이란 점이었는데, 어렵게 독해를 한 뒤에도 이 단어가 지명인지 인명인지, 아니면 단순한 명사인지, 모두 수수께끼 풀이 같은 겁니다. 그 때문에 어떤 단어는 2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뜻이 풀린 것도 있습니다.

백동수와 가까웠던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을 완독해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정 이해가 안 갈 땐 각 분야에 이름난 대학 교수님들께 여쭤보기도 했고, 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확인하느라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헤맨 일도 많습니다.”


외롭고 힘든 민족무예의 길

현실적으론 여전히 큰 반전이랄 게 없다. 24반 무예는 현재 국방부 전통의장대, 전쟁기념관등에서도 정식으로 시범을 선보이는 종목이다. 대전의 원자력연구소에선 박사 약 30명이 동아리를 결성해 수련하는 등 소수정예나마 꾸준히 지원군들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민족무예는 외롭고 힘든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에도 아끼던 사범 몇이 곁을 떠났다. 돈과는 무관한 일이다 보니 한계를 만날 수 밖에 없다. 버티지도, 붙잡지도 못하는 현실이 김씨는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상 이번 책을 내면서 자신 역시 또 한번 버릇처럼 ‘이 책을 끝으로 그만둬야지’ 생각했던 김씨다. 끝내 떠나지 못한 이유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같은 것이다.

워낙 힘들고 어렵게 버텨왔기 때문에 차마 이대로 쉽게 저버릴 수 없다. 게다가 앞으로 하고 싶고 해야 할 일들만 점점 더 불어난다. 악전고투는 무사의 짐이자 일면 명예다.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무예의 역사가 많습니다. TV의 사극을 볼 때도 병사의 역할마다 무기가 다 다른데도 뒤죽박죽 아무거나 들고 있는 장면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만큼 우리 무예에 대한 연구도, 관심도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요즘 가장 바라는 것은 국내 사관학교에서 하루빨리 우리 민족무예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하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겁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부름이 왔을 때 언제든 완벽하게 나설 수 있도록 지금도 사범들에게 실기와 이론 모두 철저히 교육 중입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2/07/1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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