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모는 시해 뒤 능욕당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소설가 김진명씨 일본 '에조보고서' 근거 시간(屍姦)주장

7월 4일 KBS 2 TV의 인기드라마 ‘명성황후’의 하이라이트가 방영됐다.(120회) 대례복을 입고 당당하게 최후를 준비하고 기다린 명성황후가 들이닥친 왜인들에게 “날 죽이면 조선의 혈기가 하늘 높이 솟을 것”이라며 호통치면서 칼을 맞고 죽는다. 일본 정규군이 시신을 수습해 불 태운다.

이 드라마 주제가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일본 낭인들로 분한 배우가 쇠줄에 매달려 날아 들어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마치 SF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하다. 시청률 19.8%를 기록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7월 18일 방영되는 대한제국 선포(124회)로 방영 14개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면 과연 이 드라마처럼 명성황후가 시해됐을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없을까.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 뮤지컬 ‘명성황후’ 등 다양한 매체로 명성황후의 죽음이 재조명된 데 이어 TV 드라마 ‘명성황후’는 종영을 앞두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실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여류 사학자의 글에 ‘능욕’ 묘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소설가 김진명씨는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났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능욕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본의 여류 사학자 스노다 후사코(吉田房子)가 쓴 역사서 ‘민비 암살’이 국내 출판을 위해 번역 작업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책을 구해 최후의 장면이 어떻게 묘사됐는지를 살폈다. 책에는 단지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만 기록돼 있었다.

‘가즈오의 나라’, ‘코리아 닷컴’ 등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소설을 써 온 김씨에게는 놓칠 수 없는 단서였다. 교원대 일어일문학과 김은숙 교수에게 요청해 작자 스노다로부터 그 사건의 내막이 무엇인지를 알아 줄 것을 부탁했다.

고령의 스노다씨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6가지 참고 자료만을 김 교수에게 일러 주었다. 그 자료들에는 시해 보고서에 대한 내용은 정작 빠져 있었다. 하지만 스노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간(屍姦)’이라는 말을 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서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말을 접한 김씨는 직접 진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김씨는 국내외 관련 논문 10여 편을 뒤지던 중 일본 사학자 야마데 겐타로(山夫建太郞)의 ‘일한합병사’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스노다가 언급한 자료들이 일본 방위청 비밀 문서로 분류돼 있어 일반의 접근이 힘들었다는 점이다.

김씨는 재일 사학자 권용섭(일본 근대 외교사 전공)씨에게 당시 상황을 최초로 일본 정부에 보고한 ‘에조(英臟) 보고서’를 복사해 전송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역사의 뒤켠에서 잠자고 있던 그 논문의 존재는 일본 의회 도서관 헌정 자료실 중 이토 히로부미 가문 관련 자료를 뒤진 권씨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일본 방위청에서 비밀 문서로 분류돼 있었다. 에조(英藏)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왕비의 침전 문을 박차고 들어 가 왕비를 끌어내 칼로 두 세 군데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다음 왕비를 발가벗겨 국부 검사(裸體 局部 檢査)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기록대로라면 능욕이 확실하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관련, 지금껏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특히 국부 검사라는 말 뒤에 보고서의 작성자인 법제국 참사관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臧)는 ‘웃고 또 노할 일(可笑 可怒)’이란 표현까지 해 놓았다.


“호기심으로 역사 윤색” 신빙성에 의문

국모가 깡패들한테 능욕당하고 화장되는 현장을 기록한 전대미문의 글을 접한 순간 김씨는 “가슴이 막히고 답답해 졌어요. 나라 잃은 국모가 당해야 했던 기막힌 고통에 울분을 느꼈다.”면서 이 자료를 공개했다.

6월 중순 공개 이후 김씨의 근작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발행한 해냄출판사 홈페이지에는 기사와 관련, 지금껏 2,000여 통의 e메일을 받았다. 애국자란 네티즌은 ‘월드컵 특수의 경제적 혜택은 일본이 독식하고 있다”며 “독도와 제주도가 일본 땅이라고 버젓이 명시돼 있는 현실을 잊지 말자”고 주장했다.

이 문서의 사실 여부에 대해 서울대 신용하 교수(사회학)는 “당시 정황은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던 아수라장이었다”며 “이는 호기심으로 역사를 윤색하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신 교수는 “궁궐로 난입해 들어 간 100여명의 낭인 중 명성황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며 “낭인들이 바로 명성황후의 침소로 몰려가 칼을 들이댄다는 설정 자체가 당시 정황을 전혀 몰라 비롯된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역사에서 유언비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교수의 언급처럼 역사학자들은 일단 김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학계 “명성황후는 단순 사망”, 능욕주장 일축
   
을미사변은 1985년(고종 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폭도가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미리 조선 훈련대 친일파 간부들을 매수해 둔 수십명의 일본 낭인을 중심으로 일본 수비대, 거류자 담당 경찰관 등 100여명의 일인이 왕궁내로 침입해 자행한 사건이다.

일제가 이같은 일을 저지른 것은 한국으로 몰려오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버팀목이었던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궁내로 침입한 폭도는 먼저 고종의 침소인 건청궁(建淸宮)에 난입해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으나 고종이 거부하자 황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명성황후의 침소인 옥호루(玉壺樓)로 달려간 이들은 왕비를 살해했다.

최근 분분히 제기되고 있는 살해후 시체 모독 등의 주장에 대해 이민원 국사 사료 편찬위원은 “그런 일을 저지를 여유가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다“며 현장 단순 사망설을 확인했다.

명성황후 학살의 비보는 민심을 자극, 위정척사계열의 유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을 폭발시켰다. 사건 이틀 뒤인 8월 22일 서울에 창의고시문이 나붙은 것을 신호로 해 1896년 1월에는 경기ㆍ강원ㆍ충청도 일대, 2월은 삼남지방 등 전국적 차원의 창의를 불러 일으켰다.

친일ㆍ친러내각 타도를 부르짖어 온 유생들은 포수, 농민, 소작농 등으로 이뤄진 의병을 이끌며 단발령을 철폐와 친일 내각 퇴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1896년 고종의 권유로 해산한다.

 

 

장병욱기자

입력시간 2002/07/12 13:41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