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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5인조 롹그룹 <비스> (下)

 아주 특별했던 한국 록의 아웃사이더

신중현의 ‘에드훠’와 김홍탁의 ‘키보이스’라는 큰 줄기로부터 가지를 치며 양산된 그룹들은 1960년대 말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를 늘려갔다.

‘비스’는 자생적인 제3의 그룹이었다. 라이더스의 보컬 이상만의 합류로 탄력을 받았지만 1970년 초 드럼 이부일이 탈퇴하면서 잠시 주춤거렸다.

멤버충원을 위해 클럽들을 순회하며 타 그룹들의 연주를 주시했다. ‘차밍 가이스’의 드러머 배광석과 ‘파이브 휭거스’ 출신 세컨 기타 겸 보컬 조용필이 오디션을 받았지만 배광석 만 영입됐다.

베이스 손정택은 “지금은 대 스타이지만 당시 조용필은 기타실력이 모자라고 보컬이나 음악스타일이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우리와는 맞지 않아 떨어뜨렸다”고 회고한다.

5인조로 복귀한 ‘비스’는 미8군 세븐클럽과 더불어 미도파 살롱과 오비스캐빈 등 일반무대에 진출하며 인기그룹 HE6에 버금가는 젊은 층의 호응을 얻었다.

‘비스’는 경쾌한 댄싱곡과 산타나의 비트 강한 곡들을 주 레퍼토리로 연주하던 중 작곡가 정민섭과 인연을 맺으며 그의 부인 양미란의 세션을 맡았다. 고마움을 느낀 정민섭은 음반제작을 주선했다.

음반발표 소식은 꿈 같았다. 곧 바로 이태원 광선여관, 오복여관에서 한달 간 합숙훈련을 하며 피나게 연습해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에 들어갔다. ‘새롭게 바이올린 현 소리를 접목해보니 소름이 끼쳤다’고 멤버들은 당시의 흥분된 마음을 전해준다.

부산 해운대에서 촬영한 재킷 사진으로 독집은 아니었지만 2장의 음반이 동시에 발표됐다. 데뷔음반<오스카레코드orp1002,1970년 10월25일>엔 HE6의 히트곡 ‘초원’과 번안곡 ‘수키수키’, ‘와와’ 이펙트 기타연주로 시도된 연주곡 ‘이나가다다비다’, ‘본 투비 와일드’등 4곡이 수록됐다.

창작곡 <파도>가 수록된 두 번째 음반<오스카레코드orp1004>엔 번안곡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와 ‘사랑의 편지’등 3곡이 수록되었다. 창작곡들은 키보이스류의 편안한 트로트 록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최대 히트곡은 ‘파도’였다.

1970년대 후반 대히트를 했지만 평이했던 이수만의 ‘파도’와는 달리 ‘비스’가 들려주었던 오리지널 곡은 후렴 부의 샤우팅이 대단했던 헤비메탈 사운드였다. 멤버들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명동 YMCA뒤 중앙다방에 팸플릿을 만들어 돌리고 DJ에게 ‘곡을 틀어달라’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했다.

어느덧 ‘비스’는 신문, 잡지에 소개가 되며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MBC ‘젊음의 리듬’ 음악프로에 단골게스트로 출연하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보컬 이상만이 바닥을 뒹굴며 노래하는 파격적인 무대매너가 TV를 통해 나가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모았다.

“더 뜨려면 ‘이상만과 비스’로 그룹명을 변경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비스’는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대학 1-2학년 층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팬 클럽 결성 움직임까지 꿈틀거렸다.

1971년 포크 듀오 아미고스의 멤버 중 가수 윤일로의 막내 동생 윤승칠을 세컨 기타로 합류시키며 6인조로 재편성됐다. 음악적으로 물이 오른 비스는 문화공보부 장관배, 플레이보이배, 경향신문배 전국 보칼 경연대회 등에서 윤승칠은 신인가수상, 이부일, 박영태도 개인 연주상을 수상하는 등 정상권의 록그룹으로 대접 받았다.

열성 외국 팬들이 일반 출연업소인 미도파까지 매일 찾아오는 등 인기들 누렸던 ‘비스’는 1972년 군사정권의 퇴폐풍조 일소 압박에 사분 오열이 됐다.

활동환경이 흔들리자 리더 이상만은 ‘신시봉과 트리퍼스’ 에 잠시 들어가 1973년 말 부산 송도의 나이트 클럽오픈 공연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1972년 11월 결혼한 이상만은 밤낮이 뒤바뀐 비정상적인 생활을 고민하

던 중 열성 팬인 박봉식 배양상사사장의 권유로 부평 공장에 스카웃 되었다. 수입이 5배가 적은 월급 4만원의 직장 생활이었지만 미련 없이 음악생활을 접었다. 현재 ㈜ 한국 보팍 터미널 상무로 재직하며 30여년간 연예인 야구단으로 출범한 ‘팝스’ 야구단을 이끌어 오고 있다.

1972년 말 센츄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나머지 멤버들은 팀을 정비해 서울과 지방의 무대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1974년 드럼 배광석이 군기피자로 끌려가면서 ‘하얀 비둘기’등 여러 그룹으로 멤버가 흩어지며 1981년 해체의 길을 걸었다.

30년 만에 다시 만난 멤버들은 “열악한 마이크, 스피커 등 음악 환경보다는 우리만의 창작음악을 오래 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아쉬워했다. 순수했던 음악활동과 우정을 기억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하며 록 음악의 부활에 작은 일조를 하려하는 멤버들의 마음은 한국 록의 만개한 모습을 기다리는 듯 힘이 넘쳐 보였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7/1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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