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안성유기만들기 60년 '유기장' 김근수옹

'안성맞춤' 몸으로 이어 온 장인

미안하지만, 방금 뭐랬지요? 나이가 드니까 귀가 어두워. 그래요, 내가 김근수요. 올해 나이가 여든일곱, 60년 가까이 유기를 만들며 살았지. 태어나기도 안성에서 태어나서 평생 안성을 벗어나보지 않았어요. 이 집만 해도 해방뒤부터 죽 여기서 살았어. 참 오래됐지요.

안성유기는 예로부터 유명하지요. 안성맞춤이란 말 유래도 그렇쟎아요. 옛날 안성에서 만드는 유기는 대부분 한양의 대가집들을 상대로 만든 것들이예요.

품질도 우수하고 보기에도 아주 아름다워 안성에 가서 유기를 맞추면 마음에 쏙 들게 만들어준다고 해서 안성맞춤이라고들 했다쟎아요. 옛날엔 정말 귀한 물건이었지. 아주 옛날엔 궁궐의 진상품이나 불교용품으로 쓰였다가 점점 생활에 널리 쓰이게 되면서 나중엔 처녀들이 시집갈 때 필수 혼수품이었쟎아요.

수저에 식기, 대접, 제기, 신선로, 범종, 촛대 등 종류도 아주 다양해요. 생활용품이라곤 하지만, 사실 서민은 쓰지 못했지. 값이 워낙 비싸거든. 옛날에 쌀 한말에 60전 할 때, 유기 식기, 대접 한 벌에 3원을 받았어요. 그러니 대가댁에서나 볼 수 있었던거지. 지금도 그 한 벌에 5만원쯤 하니까, 싼 것은 아니지요.

우리나라에 청동기 문화가 들어온건 기원전이지만 실제로 청동이 번성하게 쓰인건 고려시대부터예요. 특히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안성은 유기뿐 아니라 담뱃대나 가죽신, 창호지 등 거의 모든 전통공예품들이 망라돼 번성했던 공업지역이었어요.

조선시대 3대 시장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주 큰 시장이었지. 지리적으로도 한양으로 통하는 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서 중요한 길목이었거든, 안성이.

그중에서도 안성은 주물유기로 유명한데, 만드는 방법에 따라 유기는 방짜유기와 주물유기 두가지로 나누는 건 알지요? 쉽게 말해, 틀에 부어서 만드는 건 주물유기라고 하고 두드려서 만드는 건 방짜유기야.

안성에서는 주물유기를 만들어왔는데, 이건 만들고자 하는 물건의 본이 있어서 거푸집이란 것에 그 본을 넣고서 갯토로 판을 다져. 그리고 본을 빼낸 뒤 쇳물을 들이부으면 그릇이 만들어지는거지요. 말로 표현하려니 잘 안되네.

직접 보면 금방 이해가 될텐데. 기술로 말하자면 붓는 기술, 깎는 기술, 광내는 기술 이거지 뭐. 말은 쉽지만 사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예요. 사람마다, 지역마다 다 특성이 다르거든. 안성에는 대대로 안성에서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기법과 본이 있어요.

유기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사실 나는 맨처음에 유기 판매원 일을 했었어요. 스무살 시절이니까 1930년대쯤 될거야. 그땐 보부상이라고 했지. 그때 다 익힌 지식들이지요.

나는 주로 관공서 등을 다니면서 주문을 받는 일을 했는데, 꽤 주문이 많았어요. 저 멀리 평안도, 황해도까지도 다녔어요. 그 일을 한 이태쯤 했나.

그 일을 하면서 공장도 직접 드나들다보니 자연히 만드는 법을 보고 배우게 된 거예요. 뭣보다 내가 관심이 있었거든. 어렸을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일에 취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판매원 일을 하면서도 틈날때마다 공장에 가서 이것저것 함께 만들어보곤 했지요.

내게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신 건 김기진씨란 어른이예요. 아주 옛날부터 유기를 만들어온 분인데, 일제시대부터 직접 유기공장도 운영하다가 6.25 전쟁 뒤에 돌아가셨어.

그러다가 일제때 1935년인가 지나사변이라고 전쟁이 나니까 일본이 우리나라의 유기공장을 다 폐쇄시켰어. 쇠를 전쟁물자 원료로 쓰기 위해서. 나중에 대동아전쟁때는 쓰고 있던 놋그릇까지도 죄 공출해갔쟎아. 그 바람에 나도 유기 판매원 일을 할 수 없게돼서 이것저것 다른 일도 해봤어. 한때 광산에도 있었어.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직접 유기공장을 시작했어요. 그게 1946년이었지. 일제 때문에 잠시 다른 일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유기가 좋았거든. 이미 현장에서 배운 것도 있고, 또 그때만해도 유기가 인기 있을때니까.

그래서 해방되자마자 기술을 가진 분들 대여섯명을 모아서 공장을 열었어요. 나는 사장 겸 급사 겸 만드는 사람, 이것저것 다 한 셈이야.

당시엔 아주 호황이었어. 유기를 사려면 한참 기다렸다가 사가야 될 정도였으니까. 일감이 많아서 나중엔 약 40명이 일을 한 적도 있어. 그땐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참 많았어. 요즘과는 정 반대지요.

안그래도 요즘 제일 큰 걱정이 바로 이거예요. 이젠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어쩌다 의욕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도 얼마 못 버티고 가버리거든. 다들 신사복 차려입고 일 할 곳만 찾지, 이런 힘든 일을 하려고 들기나 하나요.

대체 얼마나 힘들어서 그러냐고? 사실 사람꼴이 아니야. 쇠는 섭씨 1000도에서 1200도 사이에서 녹아요. 그렇게 엄청나게 뜨거운 용광로를 항상 옆에 둔 채 일을 해야 돼. 게다가 쇠를 두드릴때도 한번 불에 넣었다 꺼내 한참 두드리다 보면 열이 식어서 다시 강해지쟎아.

그럼 다시 불에 넣었다 꺼내 두드려야되고, 그렇게 완전히 불 속에서 사는 거예요. 시간도 오래 걸리지, 무거운 쇠를 드는 것도 힘들지, 하루 종일 온 몸이 땀에 절어 일하고도 몇 개 만들지도 못해. 덥고 힘들어서 아침부터 종일 물을 들이키는게 일인데,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는데도 소변을 보러 갈 일이 없어요.

땀으로 다 나오니까. 그만큼 땀도 많이 흘리고 고되. 처음 일을 배우는 사람들은 실수로 불에 데이기도 하고, 옛날에 연탄을 연료로 사용할때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지는 일도 있었어. 정말 이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못할 일이야.

요즘도 나는 매일 새벽 너댓시면 일어나는데, 그것도 옛날에 새벽 네시부터 작업을 하던 습관이 굳어서 그런거예요. 낮이 되면 더 더우니까 다들 새벽바람부터 일을 했어. 소질도 소질이지만 참고 인내하는 정신 없이는 이 일을 못 배워요.

나 말고도 해방 뒤 유기공장을 차린 곳이 안성에 20군데쯤 있었는데, 6.25 전쟁을 치른 뒤 우리만 빼고 다 문을 닫았어. 전쟁통에 다들 형편이 어려우니까 유기를 사는 사람도 없고, 더구나 플라스틱이니 스테인레스 스틸같은 대용품이 등장하면서 더 사양길에 접어든거야.

요즘이야 세제가 잘 만들어져서 아무 불편이 없지만 그때만해도 놋그릇은 닦기도 힘들고 무겁다고 쓰고 있던 놋그릇도 가져가서 스테인레스 그릇이랑 바꿔버리곤 했거든. 결국 그 많던 공장들이 다 사라지고, 유기를 만들던 분들도 다 흩어져서 다른 일을 하거나 더 이상 유기를 만들지 않게 된거지.

유일하게 우리 유기공장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수출을 많이 한 덕분이었어요. 1970년대까지 한 30년동안 우리는 외국에 수출을 많이 했거든. 그 덕분에 국내에서 사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도 그나마 타격을 덜 받고 끝까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거야.

물론, 도중에 우리도 부도를 맞아서 1년동안 문을 닫고 유기를 만들지 못했던 때도 있고, 힘든 고비가 많았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손을 놓지는 않으려고 생활용품 외에도 다른 장식용 공예품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내놓는 등으로 그럭저럭 힘들 때를 넘겼어요.

우리 유기공방에 전시된 것 봤죠? 동물 조각상, 마패, 가면 같은 것들도 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디자이너까지 두고 다양하게 개발해낸 것들이예요.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다시 전통유기가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절의 불기나 제사때 쓰는 제기 같은 것들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하더니 차츰 전통유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지. 이번에도 월드컵때 주문이 많이 들어왔는데, 다 만들어 주지도 못했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물량이란게 늘 그만그만해.

요즘은 한식당같은곳에서 특히 유기를 많이 사 가요. 전통유기에 음식을 담으면 보기에도 품위가 있고 외국인 손님들에게도 독특한 멋을 풍기니까. 또 놋그릇이 위생에도 좋다지 않아요.

나는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77호 유기장이 됐는데, 이젠 아들이 내 일을 물려받고 있어. 사실상 내 후계자지요. 아들이 가업을 잇게 된 사정도 운명이라면 운명일지 몰라. 옛날에 얘가 상업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져서 대학에도 못 갔어.

그걸 어렵게 고치긴 했는데, 하여튼 그때 몸도 성찮고 하니까 그 참에 내 뒤를 이어서 유기공장 일을 맡으라고 했더니 그대로 따른거야. 그렇게 오늘까지 왔는데, 나도 이제껏 60년 동안 유기를 만들면서 싫증이라곤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아들도 이제껏 싫다는 소리 한번 한 적이 없어요.

실제로 가르칠 때부터 소질도 있었어. 아들뿐 아니라 얼마전 대학을 졸업한 손주놈도 같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더 흐뭇하고 든든해요. 제가 알아서 대를 잇겠다고 나선 손주놈이 참 대견하고 기특해. 걔도 유기를 잘 만드냐고?

아휴, 학교 졸업하고 이제 시작한지도 얼마 안됐는데 벌써 맡길 수 있나, 지금은 그냥 심부름이나 시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 살아계실 때 그 분도 유기를 참 좋아하셨어. 우리 전통적인 것을 무척 좋아해서 여기서 만든 유기도 많이 사셨지요. 대통령이 되기 전의 김대중씨도 우리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다녀가신 적이 있어요.

상 받은거? 1979년에 인간문화재 공예전에서 국무총리상, 1981년 관광민예품 공예전에서 무역진흥공사 사장상도 받았지만 그런게 뭐 중요하겠어요. 내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건 우리 전통유기를 보고 외국인들이 감탄할 때야.

나는 이 유기를 만들어 가족도 돌보고 생계도 해결했지만, 뭣보다 우리가 우리만의 독특한 전통기법으로 만든 유기를 보고 외국인들이 탄복하는 걸 보면 그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할 수가 없어요. 현대적인 기술은 외국이 앞설지 몰라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우리 고유의 뛰어난 유기제작 기술은 외국 어디에도 없거든.

예를 들어 유기를 만들면서 갯토를 쓰는데, 이건 육안으로 보면 잘 모르지만 직접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그 효과가 확실하게 느껴져. 그렇게하면 표면이 참 매끄러워지거든. 그러니깐 손을 대고서도 그걸 깎을 수가 있는거지.

이런 과학적이고 놀라운 전통기법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아주 여러 가지 다양한 기술로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거예요.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어쩌면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냐고 외국인들이 놀라는 건 허풍이 아니예요.

이젠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어. 유기 공장 일은 이제 아들이 알아서 다 잘 하니까, 나는 그저 가끔씩 공장에 나가서 조용히 지켜보는 정도예요.

바라는게 있다면 이것은 내 평생을 바쳐온 일이고, 안성유기는 이곳의 명산품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랑이기도 하니까, 앞으로도 아들이 안성맞춤의 명성을 계속 잘 살려주기를 바랄 뿐이야. 건강은 괜찮은데 오늘은 참 덥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7/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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