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시인선생님 최은숙

"사랑을 먹고 사는 꿈동산을 가꿔요"

시골의 한 중학교에 가출과 절도가 잦은 사고뭉치 남학생이 있었다. 이 아이에게 내려진 학교의 처분은 이웃의 한 교회에서 열흘간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 교회는 평소 동네 아이들의 공부방과 상담 등으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온 한 목사 부부가 있는 곳이었다. 이들 부부의 모습을 보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상 체념 섞인 마지막 처방이었다.

며칠 후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 아이를 만나면서 모두 깜짝 놀랐다. 두 가지 때문이었다. 평소 점잖은 목사 가족의 머리가 온통 노랗게 염색이 돼 있었다. 아이를 변화를 기대하고 보낸 교회에서 오히려 아이가 목사 가족에게 ‘물을 들여’ 놓은 것이다.

“하지만 더 놀란 건, 그 아이가 그렇게 미남인줄 처음 알았다는 거였어요. 몰라보게 밝아지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전연 다른 사람 같았어요. 정말 잘 생겼어요. 목사님 얘기를 들어보니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어른을 따뜻이 챙길 줄도 아는, 아주 예의 바르고 좋은 아이래요.

학교에서는 전혀 몰랐던 모습이죠. 이런 변화가 단지 목사님의 가르침이나 영향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 분들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머리를 맡겨 염색을 하게 할 만큼 그 마음을 다 받아주었어요. 단 며칠이지만,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맛보았고 그것이 결국 그 아이 스스로 자신에게 숨어있던 내면을 되찾도록 만들었을 거예요.”


아이들이 원하는건 사랑

충북 목천중학교 국어교사 최은숙(36)씨는 그렇게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청소년 가출문제야 익히 보아온 아픈 현실이지만, 선생님 최씨와 아이들이 쥐고 있는 끈은 남다르다. 가출 후 모두와 연락을 끊은 상태에서도 최씨에게는 꼭 연락을 주는 아이들이다.

언젠가 ‘제가 돌아가면 저를 집까지 데려다 주실수 있냐’는 전화를 받고 데려온 적도 있다. 부랴부랴 새벽에 달려나간 천안역에 초췌한 행색으로 아이가 돌아와 있었다. 부모님이 혼낼까 봐 최씨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웃지 못할 ‘빨간 끈’ 소동도 있었다. 아파트 빈집에 들어가 물건을 털다가 붙잡힌 한 아이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나를 용서하신다면 베란다에 빨간 끈을 묶어달라’는 내용이었다.

팝송에 등장하는 ‘노란 손수건’을 패러디 한 것이다. 부모와 함께 급히 빨간 끈을 구하느라 보자기, 이불까지 뒤지는 해프닝 속에서 최씨는 아이를 떠돌게 둔 자책감에 도리어 아이에게 마음의 용서를 구했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예요. 결국엔 마음이 외로워서 흔들리는 거지요. 밖으로 보이는 동기야 여러 가지지만, 알고 보면 대개 가족, 가정 문제 때문이죠.

부모님 중 한 분만 계시거나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이 주로 많고, 특히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 무렵에 주로 가출이 일어나요. 아이들이 원하는 건 결국 사랑이에요. 어른들도 같지 않은가요.”

교직생활 10년째, 최씨는 일면 아이들의 고향이다. 최씨의 고민도, 행복도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녀가 제자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양은 다소 독특하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의지하기 보다 그녀 스스로 자신이 아이들에게 의지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여느 권위적인 사제관계와는 달리, 아이들이 끔찍이 선생님을 챙기고 돌본다. 방학이나 휴일에도 시시때때로 보고 싶다며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건 최씨다.

전화하면 좋아라 달려와서는 잡동사니 책상서랍을 정리해준답시고 아이들은 제 선생님에게 한바탕 잔소리까지 늘어놓는다.

평소 선생님 집도 스스럼없이 드나든다. 수시로 문을 밀고 들어와서는 동네 친구집처럼 앉아 놀거나 엎드려 밀린 숙제를 하다가 돌아가기도 한다. 최씨의 딸에게 언니, 오빠 노릇을 해 준 것도 아이들이다.

학교 안이든, 밖이든 진작에 사제간의 벽이 사라진 최씨에겐 제자가 제자가 아니라 반쯤의 살붙이다.

수업 때도 교실로 걸어오는 최씨 모습만 보이면 미리 저희들끼리 ‘떠들지 말라’고 고함을 질러대며 부탁하지도 않은 군기를 잡는 수호 천사들까지 한 부대다.


절반의 살붙이로 지내는 제자ㆍ학부모

학부모들도 다르지 않다. 최씨의 호칭부터가 ‘선생님’이 아닌 ‘단하(최씨의 딸 이름) 엄마!’다. 최씨 집은 동네 사랑방이다.

제자들뿐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문턱 없는 이웃집이다. 일하던 차림으로 지나다 말고 ‘단하 엄마, 차 한잔 줘유!’ ‘단하 엄마, 우리 애가 말여유…’ ‘우리 남편이 말여유…’ 누구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허물없이 털어놓는다.

그것도 모자라 최씨 스스로 ‘밤 마실’가는 일도 많다. 마음의 담장을 허물고 사는 최씨가 사는 재미다. “ 여기에 와서 선생으로 사는 맛을 비로소 알게 됐어요. 내가 아이들과 정말 친해졌구나, 그걸 가장 확실히 느낄 때는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서 있을 때예요.

대개 그런 곳에 선생님이 있으면 학생들이 같이 안 먹으려고 자리를 피하쟎아요. 그런데 제가 서 있다 보면 아이들이 하나 둘씩 제 옆으로 모여 드는 거예요. 너무나 행복해져요.”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최씨는 넉넉치 않은 가정 환경 속에서 자신 역시 성장 통을 겪었다. 1990년 한남대 국어교육과를 졸업, 이듬해 ‘한길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서산에서 초임 발령을 받아 5년을 보낸 후 현재의 학교로 옮겨왔다. 첫 1년은 특히 힘겨웠다. 지금도 적지않은 교사들이 겪고 있을 갈등과 소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의욕이 너무 앞섰던 거예요. 내가 맡은 아이들은 공부도 잘 했으면 좋겠고, 말썽도 안 피웠으면 좋겠고, 하다못해 체육대회를 하더라도 운동에서 1등을 못하면 응원만큼이라도 최고로 잘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더 아이들을 다그치게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는 저대로 지쳐서 계속 스트레스만 쌓이는 거지요.

돌이켜보면 그건 교사로서의 욕심이지, 아이들과는 무관한 것이었어요. 아마도 그때 저는 아이들을 어떤 대상으로 보았던 것 같아요. ‘나는 능력있고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이 녀석들이 협조를 안 하다니!’ 그런 마음 같은 거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 제가 아이를 낳은 후죠.” 이틀간의 지독한 진통으로 병원에서도 염려할 만큼 대단한 난산 끝에 딸 단하를 낳았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생각난 것이 아이들이었다.

“차마 손을 대기도 어려울 만큼 저도 제 아기가 이렇게 예쁘고 귀한데, 제가 맡은 아이들도 그 부모님들에겐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일까, 아이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더군요. 그 하나하나가 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마을 안에 집을 얻어 가까이 살면서 아이들은 제 집에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그전까지는 저 역시 퇴근 후 철저히 저만을 살고 싶어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구나, 이런 게 참 좋은 거구나, 인간관계의 맛을 알게 됐어요.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준 거지요. 어느 해 겨울방학인가 밖엔 눈이 쌓여있고, 남편도 집에 없는데 혼자 심하게 앓아 누웠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학부모님이 ‘걱정돼서 와 봤다’며 찾아오셨어요. 그분 남편이 ‘차가 있는걸 보니 분명히 집에 있는데 며칠째 사람 발자국이 안 찍힌다’며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가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정말 가슴 뭉클했어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교육

최씨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도 지식보다는 마음이다. 한때 동료 국어선생님과 함께 문법위주의 국어교과서를 던지고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시청각 교재들을 다양하게 활용해 문학위주의 수업을 한 바 있다.

또 반신반의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작은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했던 어느 국어시간, 의외로 즐거워하며 거뜬히 써내던 아이들이 기특해 최씨가 내놓은 상품은 숙직실에서 직접 땀을 뻘뻘 흘리며 삶아 온 계란 몇 십개였다.

한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학교 한 켠에 간이 라이브 무대가 마련됐을 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의해 그 첫 공연 신청자로 최씨의 이름을 올려놓았었다.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최씨는 며칠간 요란한 합숙훈련까지 받은 끝에 엉성한 엄정화로 변신, 웃음과 갈채를 동시에 받기도 했다.

교사가 된 이듬해부터 시작한 ‘두레일기’란 것도 있다. 오래 전부터 최씨가 생각해두었던,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돌려쓰는 일기다. 학급의 학생과 가족 전체가 참여한 이 공개일기가 이어지면서 전 반원, 가족들이 한 식구처럼 따뜻하게 다가서는 사랑의 고리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실상 최씨뿐 아니라 목천중학교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전교생이 300명에도 못 미치는 작은 시골학교. 대처에선 필수로 실시되는 보충수업조차 이곳에는 없다. 외부 지침이야 있었지만, 교사들의 소신 어린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곳에선 성적이 아이들의 평화나 행복보다 앞서지 않는다. 남다른 이 학교의 분위기때문에 타지에 있던 교장,교감 선생님이 전근해 올 때면 적응기 동안 다소 진통이 빚어지기도 한다. 담임을 맡지 않은 올해도 최씨는 여전히 바쁘다.

도서실, 대금반, 유기농작목반 등 방과후에도 다양한 곳에서 아이들을 만난다. . 최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다 큰 사내 녀석들이 시종 선생님 곁을 위성처럼 맴돌았다.

보란 듯이 웃통을 벗어제친 녀석, 눈이 아프다고 동동 뛰는 녀석, 한 켠에선 작당한 몇몇이 어디선가 깨진 옹기를 최씨 앞까지 끌고 와 그 안에서 흐물거리는 벌레를 내놓았다. 최씨가 질겁하자 만족스러운 듯 킬킬댔다.

이윽고 최씨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너희들 자꾸 딴 짓 하면 자장면 사주는 거 취소다’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 속엔 최씨의 딸 단하도 함께 있다. 이날도 학교수업을 마친 뒤 동당거리며 엄마를 따라와 언니 오빠들을 쫓아다녔다.

헤어질 무렵, 내게 건넨 이 꼬마아가씨의 작별인사는 특별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는 게 어때요. 아니면 우리 차나 한잔 할까요’ 최씨의 통역에 따르면 ‘차나 한잔’은 사람을 붙들고 싶을 때 딸이 상습적으로 구사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아마도 엄마 곁에서 익히 들었던, ‘단하 엄마, 차 한잔 줘유!’에서 독학한 모양이었다. 모전여전, 사랑이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7/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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