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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정태춘 (上)

 세상의 아픔을 노래한 음유시인

1970년대 후반 서정적인 포크 송으로 풍요로운 인기를 누리다 돌연 박수 대신 구호가 난무했던 대중집회에서 민중가수로 돌변했던 정태춘.

그는 꺼져가던 한국 포크에 회생의 불꽃을 댕기는 대중음악가로 돌아와 쉼 없는 음악적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스스로 내팽개쳤던 ‘사랑하는 고향’을 그린 젊은 날의 서정성과 더불어 세상의 아픈 현실을 껴안은 농익은 밀주처럼 무르익은 가락과 노랫말로 그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신랄한 풍자와 비판으로만 일관했던 변혁지향의 노래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음악적 화해를 통해 발전된 포크 형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군사정권의 ‘긴급조치 9호’ 이후 가요계의 암흑기였던 1978년 낭만적인 데뷔앨범 ‘시인의 마을’로 대중들과 첫 대면을 한 정태춘. 그는 대학 출

신이 주도했던 포크나 대학가요제와는 무관했지만 대중적인 유행가수와도 어울리지 않은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초기 노래들은 유신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주도된 사랑 타령조의 감각적인 노래들과는 달리 구수한 고향의 향내를 풍기는 전원적 삶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사회 풍자적인 포크 송은 아니었지만 대중들은 사색적이고 토속적인 그의 노랫말과 서정적인 가락에 잠시 잊고 지냈던 억눌린 현실세계를 인식하며 진지한 삶의 향수를 기억했다.

그러나 데뷔시절의 그는 저항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포크가수는 결코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촌스럽고 따분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는 1979년 문화방송에서 신인 가수상을 수상한 인기 가수였다.

체질적으로 연예인의 ‘끼’ 보다는 예술혼이 꿈틀거렸던 기질은 인기보다는 포크와 국악을 접목하는 음악적 실험에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진지한 음악은 세상사에 고달픈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의 변화는 소수만이 주목했을 뿐 생활조차 버겁게 추락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지자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민중가수로의 변신은 운명적일지도 모른다. 전교조 교사들을 위한 공연으로 시작되어 음반사전심의제도 철폐를 위해 거리에서 혈혈단신으로 비합법 음반발매 투쟁을 벌인 그는 외형적인 풍성함으로만 치닫는 천박한 가요계에 기름진 자양분을 제공했다.

정태춘은 1954년 3월 농사가 주업인 평범한 가정의 5남 3녀 중 일곱 째로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그가 뛰어 놀았던 평택의 끝 마을 ‘도두리’는 끝없이 넓은 평야지역과 들꽃이 만발한 들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 그곳을 오가던 새우젓 뱃소리가 정겨웠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평택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구해와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악보를 몰라도 한번 들은 노래는 곧바로 연주를 할 만큼 타고난 음악성은 주목을 받았다.

평택 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음악성을 눈여겨보았던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형 집에서 클래식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택고 2학년 때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이 되면서 공부는 뒷전이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동네 음악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음대 진학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정태춘은 이 시기에 접한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포함한 포크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성에 낀 버스 창문에다 시조 등을 즉흥적으로 지어 쓰는 등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할 만한 실력은 없었다.

1972년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는 등 사춘기의 열병으로 방황했다.

말도 없이 가출해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하다 셋째 형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열병은 삭발을 하거나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가출을 강요했다.

그의 초기 곡들은 대학생에게 늘 위축감을 가지고 방황하던 이 시기에 대부분 쓰여진 곡들이다.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기나 시처럼 쉽게 노래를 만들 때 그는 유일하게 행복을 느꼈다.

1975년 입대 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등 많은 곡들을 쓰며 허무감에 방황하는 마음들을 달랬다.

1978년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 곡으로 데뷔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운명적인 만남과 결혼으로 음악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7/2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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