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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판소리 무형문화재 성우향

 기교를 거부한 진정한 소리꾼

“예전에는 언제나 이런 데서 창 했지라.”

경개 좋은 관악산 자락 돌 밭을 조심스럽게 걸어 가며 노장은 좋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요렇고럼 반원을 그려 앉으면 내 목소리는 저그 저 끝까지 들렸어요.” 모처럼 관악산 계곡을 찾은 춘전 성우향(72ㆍ본명 성판례)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진다.

1982년 이래 매년 여름이면 벌여 오고 있는 여름 산(山) 공부 현장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춘향가’ 중 눈대목(유명한 대목)을 북 장단 치며 선창하면 쭉 둘러 앉은 제자들은 목청껏 따라 하는 산 공부는 그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저 건너 춘향집 보이난디/양양한 향풍이요…”

2001년 7월 한달 꼬박 전남 화순군 남면 유마리 유마사(維摩寺) 별채에서 벌였던 여름 산(山) 공부 때는 왼손으로 북 장단을 쳐 가며 후학들을 가르쳐야 했다. 매끄러운 산길을 헛디뎌 오른팔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정대로 8월 16일 남원 의료원 본원 강당에서 발표회 겸 위문 공연까지 펼쳤다. 치료도 거기서 받았다.

그는 혼자 있는 법이 없다. 언제나 젊은 사람들과 북적대며 산다. 손수 장단을 쳐 가며 제자들에게 목풀이용 단가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3년전 담배를 끊어 손에는 심심풀이용 강냉이가 쥐어져 있다. 초롱, 달웅이란 이름의 발발이 두 마리가 연신 안겨 든다. 담양 갔다 온 제자가 선물하는 죽부인에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칠순나이에도 후진양성ㆍ무대 고집

서울 신림5동 사단법인 성우향 판소리 전수관에서의 정규 수업은 언제나 1대 1이다. 그가 매일 직접 열 댓 명 정도 봐주는 제자들은 선생 앞에 좌정한 뒤 먼저 녹음기부터 켠다. 안숙선 김수연 박양덕 등 내로라 하는 명창들이 한번씩 거쳐 간 곳이다.

북 장단을 쳐 가며 선창을 해 보이는 스승, 두툼한 판소리 대본을 무릎팍에 펼쳐 놓고 스승의 입과 대본을 번갈아 보는 제자 사이에는 아무 것도 끼어들 틈이 없다.

10년째 곁에서 시중 드는 제자 이선규(53ㆍ‘춘향가’ 이수자)는 “요즘도 공연이 있는 날이면 만류를 뿌리치고서라도 새벽 4시부터 연습에 들어 가신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 ‘춘향가’ 보유자, 사단법인 성우향 판소리 진흥회 이사장 등 굵직한 직함을 갖고 있는 춘전은 칠순에도 후진 양성과 무대 현장을 고집하는 별난 거장이다.

2월 25일 대전 정부종합청사에서 뒤늦은 문화재 인증식을 치렀지만 그의 마음은 담담하다. 국립박물관 노재명 관장은 “진작 됐어야 할 분”이라며 “이제 마음 편히 잡숫고 후학 양성에 더욱 힘쓰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우다. 전수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끼니 때를 놓쳐 중국 음식을 시켜다 함께 둘러 앉아 먹는 날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리는 단단하고 무겁고 대가 굵어, 가성으로써 산뜻하고 밝은 소리를 구하는 요즘 추세와 정반대의 소리로 일컬어 진다. 되바라진 기교 위주의 신식 소리에 대한 거부와 경고인 동시에 복고풍의 정수이다.

칠순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나 싶을 정도로 헌걸찬 목청이다. 귀명창들은 1998년 5월 완판 판소리 ‘춘향가’에서 보여준 그의 절창을 잊지 못 한다.

그것은 소소한 공연으로만 이어 온 12년의 공백을 메꿔 2001년 11월 ‘소리 유파 발표회’에서의 환호로 이어졌다.


배곯던 수업시절, 앵콜도 야속

수업 시절 그는 하루 10~15시간 공부하는 연습 벌레였다. 여자 소리라면 토막소리에 그치던 시절, 여자 소리꾼으로서는 유일하게 ‘심청가’와 ‘춘향가’ 전바탕을 한자리에서 공연한 것은 두터운 연습량 덕택이다.

“눈만 뜨면 공부했어요.”판소리에 넋이 뺏긴 가난한 농부의 딸이 택할 수 있었던 길은 그것뿐이었다. 심봉사가 심청이 키우느라 고생고생 하는 대목을 부를 때면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펑펑 솟아 나와 어느덧 객석까지 그렁그렁하게 만들고 만다.

가난의 기억은 악착같다. 달동네에서 1년을 살던 1970년대에 그는 하루 세 끼니를 모두 채우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판소리 공연을 하는 날이면 점심을 굶었지만 무대에 섰다. “앵콜을 소리치는 객석이 야속했던 때였지요. 그럴 때면 억지로라도 한 번 더 해야 속이 풀리는 내 팔자란.”

그 팔자는 고향 화순에 판소리를 가르치던 판소리방에서부터 시작됐다. 7살부터 ‘춘향가’ 중 ‘옥중단가’를 뜻도 모르고 따라 하던 그의 소리 팔자는 남원 명창 강도근으로부터 반년동안 ‘흥보가‘를 배우면서 운명으로 굳었다.

조그만 아이가 목 좋고 잘 따라 하니 유달리 예뻐해 준 스승 때문이다.

“소리꾼이 득음 때 피를 토한다는 말은 강 선생님이 TV 프로에 나와 했던 건데 잘 못된 말이에요.” 타고난 목이 좋았던 자신의 경우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유달리 예를 갖추는 스승이 정응민이다.

“20살 때 정응민 선생님 댁에서 숙식하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네 마당을 완판으로 뗐어요.” 동기생 30여명 중 그는 가장 어렸지만 소리가 제일 빼어나 스승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힘들 때였응게 사모님이 밖에 나가면 나 혼자 오라해서 쌀과 간장을 주셨지요.”

7년을 그렇게 보낸 그는 1956년 서울로 와 명창 박초월 박녹주 등 당대 제일의 명창들을 스승으로 모셨다.

집에서 부쳐 준 돈으로 청진동에서 하숙하며 소리 공부를 바짝 죈 그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해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과 나란히 무대에 설 정도였다. ‘춘향가’와 ‘심청가’의 달인으로 각광 받던 그의 주무대는 남산 시절의 KBS 방송국이었다.

이후 1960년대는 남편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삼양동 달동네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소리 공부를 늦추지 않았다.

1972년과 1974년 명동예술극장에서의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이 그 열매다. 당시 판소리 완창자는 박동진 성우향 오정숙 등 세 명 뿐이었다. 국립국악원의 부름을 받은 그는 1976년 영국의 ‘동양음악제’를 필두로 10년 동안 해외 공연을 다녔다.

“소리하는 사람 외로와. 남이 좋아할 때까지 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디. 새벽에 소리 공부할 때 참 외로와.” 그는 너무 연습해 말도 못 하게 목이 쉬어 버리는 때가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일고수 이명창이라 했다. 그는 1970년대에 자신의 소리를 받치고 끌어 준 고수 김명환을 여전히 그리워 한다.


산공부 20년, 올해도 유마사서 열려

1982년 이래 무더운 여름이면 펼쳐 온 산 공부는 올해도 벌어진다. 산 공부를 마치고 내려와 마을 길을 걸어가는 제자들의 입에서는 단가 한 대목이 흘러나와 구성진 합창을 이룬다.

올 여름 산공부는 7월 18~8월 18일까지 유마사에서 전수소 학생 중 희망자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다. 올해의 산 공부 발표회는 8월 24일 신림동 성우향 판소리 전수소에서 펼쳐진다.

1999년 1월 그의 판소리 홈페이지(www.pansori.co.kr)가 개설돼 그도 별 수 없이 사이버 시대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러나 아홉 살까지 아버지의 등에 업히거나 지게에 얹혀 듣던 구성진 ‘진도 아리랑’ 가락은 영원한 고향이다.

장병욱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7/2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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