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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혁개방 신호탄 올렸나?

북한 개혁개방 신호탄 올렸나?

임금·물가인상 책임경영 강화 등 경제개혁 단행, 자본주의 체제 도입 '도박'

북한 당국은 7월부터 대폭적인 임금 및 물가 인상, 기업소의 책임경영 강화 등을 골자로 한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자본주의 최고의 가치인 ‘가격’ 개념이 주민생활에 자리잡고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권 개혁개방의 핵심적 사안이었던 가격구조조정, 계획부문의 축소 등 구조적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북한이 체제를 건 거대한 도박을 시작한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대담하고 혁신적인 것’(일본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임에는 틀림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7월 26일 “사회주의 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가장 큰 실리를 얻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역사상 사회주의는 경제 시스템의 작은 변동에서 출발해 몰락해왔다. 북한 변화의 핵심이 무엇인지 남북문제 전문가와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기업인, 북한 당국의 언급 등을 종합해 문답식으로 정리해본다.


화폐경제체제 진입, 생산자율권 보장

- 경제개혁의 내용은 무엇인가.

북한은 우선 체제 유지의 골간을 이뤄온 배급제를 시장가격 체제로 현실화(쌀의 경우 550배 인상)했다. 그러자니 임금을 대폭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산 노동자 평균 임금이 18배 올랐고, 탄부는 노동자 평균임금 2,000원보다 두 배 이상 많은 6,000원을 받게 됐다.

이러니 시장체제의 매개체인 화폐기능을 강화해야 했다. 유통이 거의 안됐던 500원 권의 공급을 대폭 늘리고 1,000원 신권도 발행하는 한편 ‘외화와 바꾼 돈표’를 폐지하고, 환율을 현실화했다. 화폐경제 체제로 진입한다는 의미이자 개방을 대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개혁의 바탕은 생산 주체에 대한 자율권의 대폭 보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84년 도입됐으나 유명무실했던 ‘독립채산제의 올바른 실시’가 바로 그것이다. 공장이든 기업소든 생산 주체는 ‘번 수입에 의해 평가’를 받는 체제로 전환된다. 적자 기업의 경우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농민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의 경쟁 원리가 본격 도입된 것이다.

북한은 그러나 임금과 가격의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행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의무교육이나 치료부문,사회보험제, 정휴양제, 상이군인 우대제 등에 대한 사회적 시책들은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는 생산수단의 전인민적 소유에 기초한 계획경제”라며 “일련의 개선 작업들은 이 테두리 안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선을 긋고 있다.


국가재정악화가 개혁 불렀다

- 경제개혁을 취한 배경은.

우선 국가재정의 악화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그 동안 식량뿐 아니라 공업부문에도 높은 수매가, 낮은 판매가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붕괴 등 국제정세 변화로 국가재정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어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어려워졌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는 생산력 침체로 표출됐다. 장기간 평균주의 분배에 따라 주민들의 생산성 향상 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임금과 물가가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농민을 비롯한 주민들의 생산의욕을 높이고, 일한 만큼 배분해 결과적으로 놀고 먹는 분위기를 없앨 필요가 있었다.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문제는 점점 북한 당국을 압박했다. 쌀의 경우 국정가격으로는 배급 받기가 어려워 천상 농민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그 가격이 ㎏당 40~50원이어서 임금(100~200원)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북한의 배급망은 붕괴 직전 상황이었다. 때문에 암시장은 점점 활기를 띠었고, 국정가격과 암시장 가격차도 커졌다. 지하경제의 활성화는 북한의 계획경제를 속에서 갉아먹고 있었다.


탈법적 지하경제활동에 제동

- 임금과 물가를 함께 인상한 이유는.

북한 당국이 임금인상과 함께 물가인상까지 한 것은 계획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농민시장 등 사경제(私經濟)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자 일반 주민들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 때부터 수많은 탈법적 기업활동이 늘고, 중국과의 보따리 장사나 농민시장을 통한 생필품 장사 등을 통해 돈을 번 주민들이 많이 생겼다. 심지어 개인자본이 10,000원이 넘는 ‘사업가’도 있다고 한다.

또 농민시장에서 떡이나 빚은 술만 팔아도 평균 월급의 20~30배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게 탈북자의 전언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농민시장 등 북한의 사경제 규모는 90년대에 비해 6배 정도 늘어난 6억1,000만 달러로 추정된다. 결국 이번 물가인상은 이같이 주민들이 갖고 있는 자금을 국가재정으로 흡수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외부자원ㆍ계획경제 뒤따라야

- 북한 당국이 이번 조치로 기대했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북한 정부가 곡물과 생필품을 농민시장보다 싼 가격으로 얼마나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북한은 쌀값은 올리되, 식량 배급표를 발급하고 쌀을 구입할 수 있도록 임금을 보장한다면서 배급제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으나, 공급이 안되면 모든 게 허사이다. 공급 부족은 곧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어느 정도의 공급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이 같은 파격 조치를 내놓은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지난해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용품 식료품 축산농장 등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기초 생활물자 생산공장과 기업소를 집중 현지 지도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외부지원과 계획경제의 근본적 개혁 없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한 만큼 벌수 있다는 자립화 심어줘

- 개혁조치가 주민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북한의 조치는 국가의 배급에 의존해왔던 주민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각자 생활을 꾸려나가는 자립화’를 선언한 것이다. 조선신보는 “이번 조치로 누구나 일한 만큼 분배를 받는다는 사회주의분배원칙이 생활의 실감으로 성큼 다가왔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50년 이상 국가에 의존해온 주민들이 이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가중된 경제난으로 많은 주민들이 나름대로의 사는 법에 익숙해 졌다고는 하지만, 국가에 기대온 습성은 남아있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민화협 김창수 정책실장은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가계를 꾸려갈지 걱정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북한의 개혁이 곧장 주민들의 사상이념까지 뒤흔들 것 같지는 않다. 탈북자들은 “주민들은 처벌을 받지 않을 만큼 생활총화, 사상학습, 집회 등에 적당히 참가하는 것 외에는 오직 먹고 살 궁리,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면서 “괜히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머리 아프고 위험한 체제니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여유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시장경제시스템 수용 가능성

- 이번 개혁이 중국식 시장경제로 가는 단초가 될까.

중국은 80년대 초반 북한의 조치와 비슷한 국정가격 조정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앞으로 중국이 취해온 길을 계속 답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아직까지는 북한이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고 국영 매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계획경제의 틀을 유지하되 그 부작용은 치유하겠다’는 선에서 북한이 이런 조치들을 내놓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판단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농민시장의 활성화라는 현실을 불가피하게 수용한 데서 보듯이 국가의 경제통제가 더욱 어려워질 경우 정치체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시장경제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수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는 최근 사견임을 전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둘러본 뒤 경제 일꾼들에게 경제제도를 연구하도록 했다”면서 “북의 변화는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 취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동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2/08/0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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