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국의 경제운용 시스템에서 배우는 교훈

첫 번째 재료. 아서 앤더슨, 딜로이트 앤 투쉬, 언스트 앤 영, KPMG, 프라이스워터하우스 쿠퍼스의 공통점은? 미국 5대 회계법인이며, 모두 다 기업감사와 관련해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는 회사들이다.

컴퓨터 어소시에이츠, 루슨트 테크놀로지, 월드컴, 메릴린치, 케이마트, 제록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미국 기업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회계부정이나 재무정보 공시와 관련한 문제로 조사를 받고 있는 회사들이다.

두 번째 재료. 미국에서는 주식의 주인이 바뀌는 정도(turnover)가 이제 일년에 100%에 근접하고 있다. 1960년 뉴욕증시에 상장된 회사들의 주식은 1년에 평균 12% 정도만이 주인을 바꿨다고 한다.

그 비율이 1990년에는 46%, 2000년에는 88%, 그리고 2001년에는 94%로 뛰었다. 2002년 5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98%를 기록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주식을 샀다가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면 주저하지 않고 버린다.

위의 두가지 재료들을 섞으면? 안 그래도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하는 투자자들은 기업들을 신뢰하지 못해 주식시장을 떠나고, 증시는 계속 하락의 길을 걷고, 자금의 많은 부분을 주식시장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돈줄이 마르고, 안 그래도 약한 경제는 더 골병이 든다.

우리에게 항상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자신들 제도의 우수성을 과시하던 우리 이웃집 미국은 지금 난리다. 대통령이 나서서 기업들 겁도 주고 이런저런 제도도 도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그 내용 중 많은 것들이 현실성이 희박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잘못한 경영자는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부시의 발언도 미국의 법제도상 현실화 되기 지극히 힘들다. 차라리 모든 법에 우선하는 "국민감정 및 여론"이 존재하는 우리 나라가 그런 면에서는 더 화끈(?)할 수 있다.

더욱이 부시 대통령 자신과 체니 부통령도 왕년에 민간섹터에 있을 때 바로 동일한 문제들에 연루된 의심을 받고 있고, 기업들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첨병역할을 하는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수장 하비 피트마저 월스트리트에서 변호사를 했던 경력으로 사임압력을 받고 있으니 정치적 리더십을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상황이다.

경제 대통령 그린스펀도 별다른 수가 없는 듯이 보인다. 2001년 12월 이후로 1.75%를 유지하고 있는 이자율은 최근 40년 이내에 가장 낮은 수준이어서 이자율을 더 낮추어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방안은 지금으로서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인간과 시스템의 문제

이런 이웃집의 불행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 ‘잘난체 하더니, 고소하다. 이제 미국의 제도도 문제가 많은 것이 밝혀졌으니 그동안 노력했던 구조조정과 개혁 등은 옛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다. 인간(human)과 시스템이 그 둘이다. 즉, 미국의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것이라면 물론 시스템을 고쳐야 하지만, 욕심많은 인간들이 건전한 시스템을 사보타지한 것이라면, 오히려 시스템을 더 강화해야지 버려서는 안 된다.

혹은, 시스템이 있기는 한데 그 운영을 허술하게 방관했다면 제대로 된 시행을 통해 일벌백계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미국의 제도가 엉망인 것 같은 느낌과 실제로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미국 증시 S&P 500 지수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95년 1월초에 비하면 아직도(2002년 7월초) 2배 증가한 수치라는 것도 사실이다.

기업들이 경영은 제대로 안 하면서 숫자나 조작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지만, 1995년과 비교하여 생산성 성장률이 3배에 달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임금성장률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1985년에서 1998년 사이 34개국 6만개 회사들의 회계자료를 비교한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회계정보 조작과 관련된 세가지 기준에서 미국이 가장 깨끗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가하는 생산성과 지속적인 임금 하락은 더 높은 기업이윤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2000년 이후 급감했던 기업들의 정보통신 영역 투자도 다시 증가될 타이밍이 되었다는 평가다.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라는 월드컴의 7월 22일 파산 소식이라든가 또 다른 메이저 기업이 회계부정으로 재무성과를 다시 고쳐야 한다는 사건 같은 것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미국 자금시장은 의외로 단시간에 회복할 수도 있다. 즉, 미국의 시스템 자체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욕심많고 악한 인간본성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시스템을 더 강화하거나,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던 시스템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다.


금감원 권한 강화 방안 등 거론

당장 가능한 조치들로는 금융감독원의 예산과 영향력을 더 늘리는 방법, 내부자들에게 주식을 보유하도록 하되 일정기간 동안 매각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사외이사들의 수를 더욱 늘리고 감사-보상위원회는 사외이사들만이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 회계정보를 최고경영자들이 개인적으로 인증하도록 하는 방법 등이 거론됐다.

시스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최근 미국 의회가 기업개혁법안을 초당적으로 신속하게 합의한 것은 바로 이 같은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상하 양원은 7월 24일 기업부정 연루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독립 회계 감독위원회를 신설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기업개혁법안에 합의하고 상하원 투표를 통해 승인했다.

이와 함께 파산보호를 신청한 미국 제6위 케이블 TV업체 아델피아의 창업주 존 리가스 회장과 그의 두 아들을 회사자금 유용 및 사기 협의로 전격체포됐다.

"바보들은 직접 경험을 하고서야 배우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 참에 지금의 제도들을 더 정비하고 강화할 부분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제도들을 그대로 실행할 의지와 여건을 마련한다면 이웃집이 저지른 같은 실수는 피할 수 있다. 다른 이웃 싱가포르가 깨끗한 것은 사람들이 천사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혹독한 벌금을 포함한 강력한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실제 그대로 실행하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

김언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입력시간 2002/08/0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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