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시인 신경림

우리시대를 향한 55편의 전언 담긴 새 시집 '뿔' 발행

달라진 건 없다. 여름 휴가길의 화려한 옷 단장에서 남루한 행색까지 서울역은 언제나 인파로 북적대고 있다. 서울역 광장에 선 신경림(67) 시인의 시선은 그 너머에 닿아 있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쓴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눈빛이다.

장마비가 막 그친 광장의 2002 한일 월드컵 기념품 판매 센터 앞 아스팔트 바닥에는 노숙자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복지부동의 자세로 또 하루 분의 삶을 가늠하고 있다.

7월 1일 발행된 새 시집 ‘뿔’에서 시인은 서울역을 가리켜 ‘여름이라서 더욱 찬 빗줄기가 떨어져 찢어진 신문지 조각, 먹다 배앝은 음식 찌꺼기들을 축축하게 적시는’ 곳이라 했다(‘비에 젖는 서울역’).

시인에게 역이란 무한경쟁 시대를 사는 우리의 뒤안길이 불거져 나오는 곳이다. ‘역사에서는 노숙자들이 여전히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자고/지하도 입구에서는 다리 없는 노파가 오늘도 두 손을 벌리고 엎드려 있’는 현실을 그는 아직도 스쳐 지날 수 없다(둔주).


초라한 그들을 향한 걱정 가득

창비시선 218호인 ‘뿔’은 1973년 출판됐던 창비시선의 제 1호 시집 ‘농무(農舞)’ 이래 모두 8번째 시집이다. 창비시선 200호를 기록했던 그의 ‘불은 언제나 되살아 난다’ 이후 4년 만이다. 시집에는 우리 시대를 향한 55편의 전언이 담겨져 있다.

“다들 너무 월드컵 타령이니 외화내빈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서요. 즐겁고 신나지만 문제는 그대로지요. 장사하는 사람들 보세요. 경기 활성화란 공염불 이잖아요?”

시인은 여전히 초라한 삶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29년 전 그대로다. ‘농무’에서 시인은 ‘우리의/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겨울밤)이라 노래했다.

지금도 시인은 우리에게 부과된 악착 같은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묵 내기 화투나 색시 젓갈 장단은 이제 노래방 여흥과 룸 살롱 따위로 치환됐다. 그렇다고 바뀐 게 있나.

새 시집은 ‘새 천년이 된들 무엇이 나아지랴/더 강력하고 더 무자비해진 차 바퀴에/더 많이 더 빨리 깔려죽겠지’(개미를 보며)라고 예측한다. 그는 “우리의 문제는 엄연히 살아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육성은 훨씬 정교해졌다. ‘까페에 앉아 K.331을 듣다’는 찻집에서 들리는 모차르트의 선율에서 끌어 낸 시다. 부엉이 울음 소리나 씻김굿의 한과 신명 등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던 이미지가 아니다.

‘중년의 마담이 카운터에 앉아 졸다가 깨어 모짤트를 브람스로 바꿔 놓는다’(비) 같은 표현은 ‘진폐증으로 입원한/아들을 보러 간 주모’를 노래했던 ‘꿈의 나라 코리아’(1989년 작)과는 분명 다른 차원이지다.


말의 난장판, 언어의 유희서 벗어나야

시인은 “이 다양성의 시대가 갖는 문제를 시가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술적 변화다. 동국대 영문과 시절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정담 시집’에서 배웠던 미학적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인은 경고할 의무가 있다’는 명제는 여전히 그의 대원칙이다.

‘뿔(角)’은 ‘쟁기를 끌면서도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이려 하면 가고 워워 하면 서는’ 우매한 소(牛)로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을 은유 한다. 그러다 ‘불(火)’에서는 배달부, 급사, 양조장집 딸이었던 그들을 ‘깡그리 태워 없애는 불’이라 부른다. 마침내 ‘제 형해 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 없앨’ 불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시인의 뜨거운 가슴은 시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동국대 국문학과 석좌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지난 학기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3시간씩 대학원 강좌 ‘시창작’을 강의했다. 2학기부터는 더 싱싱한 학부 강의다. 그는 “요즘 젊은 문인들이 하듯 시를 억지로 만들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뿐이죠.” 결국 언어 유희를 벗어 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생각 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때문이라고 본다.

PC 통신상의 행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엽기나 패러디라는 명분으로 역사와 사회에 대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말해버리는 풍토에 이제는 젊은 시인들까지 영합하고 있다며 걱정이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신작들의 상당 부분은 자폐증의 징후마저 드러내고 있어요.” 아무리 감각이 앞서는 영상 시대라지만 문인들마저 남이 알아 듣지도 못 할 말을 중언부언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현상을 파악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우려다.

“역사나 사회 문제는 물론 그들은 사실 모든 것들에 대해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해요.” 이 부분에 이르러 그의 비판은 가차없다. “1편짜리 시를 10편으로 불리는 식이니 응축미가 없어져 시의 울림이 적은 것은 당연한 결과죠.”

그는 언제나 열려 있다. 문학의 집에서 원로 문화 인사들을 강사로 초빙해 진행중인 ‘수요 문화 광장’의 강의 요청을 마다 않는다. 출판사나 작가들이 직접 새 작품집을 우송해 주지만 그것도 부족하면 직접 사서 본다.

신작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서너 편만 읽어 보면 나머지 작품은 훤히 아는 경지다. 그의 강의가 유독 인기 있는 것은 청년에서 노년까지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려는 노력 덕이 크다.


문학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1998년 발표작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 교육 펴냄)는 지금까지 26만부가 팔렸던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 셀러다.

특히 MBC-TV의 ‘!’ 방송을 탄 직후인 5~6월에는 베스트셀러 순위표를 뜬 적이 없었다. 이후 갖가지 매체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그는 “나는 문학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출연을 고사하고 있다.

그는 7월초 출판사측과 협의해 인세와 출판사 이익금을 합친 돈 4억 5천 만여원을 불우 이웃 돕기 성금으로 써달라며 MBC측에 내놓았다.

“조태일 시인의 일이 가장 가슴 아프군요.” 진작 알고 있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 때 단지 지식인이란 이유로 함께 두 달 동안 수감돼 부쩍 친해진 사람이다. 이후 언제나 소주 병을 끼고 살던 조태일은 1999년 간암으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고교 시절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와 릴케를 다시 정독하려 한다. 올 초 전집 26권짜리를 구입해 뒀지만 ‘뿔’ 발간에 치여 미뤄 뒀던 책이다.

“어렸을 적 깊이 받았던 영감의 원천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볼 수 있겠죠.” 시인은 예감한다. ‘예순에 더 몇 해를 살아 보아 온 같은 풍경과 말들/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릴 것’(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그 너머를 본다. ‘저 세상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다(떠도는 자의 노래). 이번 시집의 맨 앞에 위치한 이 두 작품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시다. 바로 지금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는 역이나 떠돎 등 유난히 여행과 관련된 이미지가 유달리 많다. 보고타, 호치민, 하노이, 단둥(丹東), 투먼(圖們), 지안(集安), 장바이(長白) 등 지역 이름이 제목 바로 옆 괄호 안에 부제로 들어가 있다. 1992년 이래 중국을 출발로 해 두루 다녔던 고장이다.

8월이면 베트남에서는 고은 김지하 등의 대표작과 함께 베트남어 시선집이 발행된다. 오는 10월은 몰리에르 극장 초청으로 프랑스를, 12월은 미시간대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다.

지금 ‘우리 교육’지에는 그의 연재 자서전 ‘내가 다닌 학교 이야기’가 10회째 게재되고 있다. 소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시인의 학창 시절과 그 시대의 모습이 정겨운 입담으로 살아 난다.

이 잡지 연재 분을 모아 하반기중으로 펴낼 ‘시인을 찾아서’ 2부에는 김지하 고은 강은교 김용택 이해인 등 생존 시인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이다. 잘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그는 책을 위해 한 사람 당 2~3일씩 발 품을 팔았다.


작지만 완벽한 시집 남기겠다

시인은 “지금까지의 시를 능가하는 시 30편으로 작지만 완벽한 시집을 꼭 남기고 싶다”고 꿈을 이야기했다. 절차탁마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이다. “이제는 외국보다는 한국에서 못 가 본 울릉도와 개마고원 등지를 찾아 신작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노숙자들 모습은 가급적 사진에 담지 말라”던 신경림은 서울역 광장을 빠져 나가면서 하회탈 미소를 지으며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정겨운 우리의 산하 하나가 저만치 걸어 가고 있었다.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2002/08/04 13:52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