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의 경제서평] 세계화시대 부의 분배방식


■ 부의 분배
(에단 캡스타인 지음/ 노혜숙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성장이 우선이냐, 분배가 중요하냐. 경제에 있어 효율성과 공정성은 어느 것이 먼저인가, 그리고 양립이 가능한가.

빵(경제)과 윤리(정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경제학이 학문으로서 자리잡은 이후 끝없이 계속된 물음이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정답’이 달라져왔다. 그렇다면 세계화 시대에 노동자들의 복지는 더 향상되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신자유주의, 신경제가 분배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세계화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정책 결정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판적 신경제론자’인 셈이다.

이 책의 부제는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이지만, 그 보다는 ‘세계화는 노동자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가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른다. 저자 주장의 핵심은 가진 자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빈곤층을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윈-윈 게임을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켜줄 수 있는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경제관계는 무엇인가.

종종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화의 세력들을 조명하면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화의 이익을 분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책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말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게 이익을 분배’하면 되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말은 저자의 기본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몇 가지를 들어보자. “부의 분배는 사회의 법과 관습에 달려 있다.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규칙들은 시대와 나라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그리고 인류가 마음먹기에 따라 더욱 달라질 수 있다.”(존 스튜어트 밀)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는 쿠바의 노예들이 설탕 값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단순 노동자들은 생산력의 전반적인 향상에 더 이상 관심을 잃게 된다.”(헨리 조지) “노동자들의 운명을 자유방임에 맡기는 것은 그 자체가 불안정한 일이다.”(칼 폴라니) “빈곤이 심화하는 곳에서는 불공정이 심화한다. 부자가 한 명 있으면 적어도 500명의 빈자가 있기 마련이며, 풍족한 소수는 빈곤한 다수를 상정한다.”(아담 스미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세계화 과정에서 자유 교역과 시장 자유화는 필연적으로 소득의 불균형을 증대 시킬 수 밖에 없는가. 정부가 국고를 제대로 갖추자면 우리가 사회 안전망을 얼마나 희생해야 하는가.

경제와 기술의 변화가 비숙련자 무교육자 빈곤층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시장 공정의 발전은 기회와 안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저자가 제기하는 기본적인 질문들이다.

여기에 대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이 함께 하는 세상을 건설하자면 경제 정의- 사회 안전망과 더불러 자원과 기회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 답변의 핵심이다.

저자는 분배와 성장은 서로 대립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숙련 노동자들과 빈곤층에게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부여하는 분배정책은 국가의 성장을 저해하기보다는 국가 경제 더 나아가서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은 문제는 상식을 실천에 옮기는 정책을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상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법, 즉 노동자의 편에 선 경제정책에 대해 저자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사회는 차별을 철폐해야 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 수준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저자는 개인과 연합차원에서, 국가 차원에서, 국제 차원에서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국가보다는 개인과 국제 차원을 더 중요시한다.

이러한 제안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의문이다. 노동자를 위한 브레튼 우즈 회담을 열자는 식이 적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역자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다소 아쉽다.

강병준 전자신문 정보가전부 기자

입력시간 2002/08/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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