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눈 질끈 감고 北과 손잡기

진정한 화해·신뢰구축까진 먼 길

“부부싸움(서해교전)이 벌어졌다. 아내(북한)가 먼저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남편(남한)이 대충 눈 감고 받아들이면 부부관계가 복원된다. 그러나 남편이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려 고집한다면 아내는 자존심 때문에 집을 나가 버릴 것이다. 북한이 자존심을 꺾으면서 내놓은 유감표명을 적절히 수용할 아량도 필요하다”.(햇볕론자)

“남북관계는 부부관계가 아니고, 우리 장병이 숨진 서해교전은 부부싸움이 아니다. 북한은 사랑스러운 아내가 아니라 적화통일의 허황한 꿈꾸는 존재다. 다시는 서해교전과 같은 도발을 못 저지르도록 확실하게 사과를 받아내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햇볕정책은 주변상황과 북측의 태도에 따라 탄력성 있게 조정돼야 한다”.(햇볕정책 비판론자)

서해교전으로 동결됐던 남북관계가 최근 급속도로 복원되고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햇볕정책은 기로에 서 있다.

북한이 7월 25일 유감을 표명하고 장관급 회담을 제의했지만 서해교전으로 촉발된 남한 여론의 대북 불신감과 임기 말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직접 만나 따질 것은 따지겠다면서 대화에 나섰지만, 북측은 유감표명 이상은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가 서해교전을 북측의 계획적 도발로 성격을 규정하고, 특히 현실적으로 받아내기 어려운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스스로 햇볕정책의 탄력성을 제한한 측면도 있다.

DJ 정부는 대북 화해ㆍ협력을 바탕으로 무력충돌 위험을 미리 막자는 햇볕정책의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경의선 연결 등 서해교전의 앙금을 잠재울 성과를 도출해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더욱이 임기 말 햇볕정책은 국내 여론의 지지나 DJ 정부의 리더십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북한의 호응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만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이다.


북, 실무접촉서 전향적 자세

일단 남북은 햇볕정책의 전성기인 2000년 6ㆍ15 정상회담에 버금가는 합의를 다시 내놓았다. 2~4일 금강산에서 열린 7차 장관급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북측의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이었다.

남북은 서해교전으로 동결된 남북관계를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4ㆍ5 합의 수준으로 완전히 복원키로 했다.

북측은 덤으로 부산 아시안게임(9월29~10월14일)에 참석키로 했고, 무려 1년 6개월 만에 4차 적십자 회담을 금강산에서 열기로 잠정 합의했다. 금강산 상설 면회소 설치 등 해묵은 인도적 사안을 논의할 장이 겨우 마련됐다.

남북은 특히 7차 장관급 회담에서 군사당국자 회담 재개 문제를 의제로 올려 놓기로 합의했다. 군사회담을 통해서만 경의선 철도ㆍ도로 연결, 개성공단 건설, 금강산 육로 개설 등 비무장지대(DMZ)를 넘는 주요 경협 사안들이 활기를 띨 수 있다. 남북은 2000년 9월 1차 국방장관 회담과 지난해 2월까지 5차례의 판문점 군사실무회담을 통해 지뢰제거를 위한 군사보장 등 원론적인 합의를 본 상태이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도 있을 전망이다.

이 추세라면 남북은 8월 12~14일 장관급 회담을 기점으로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회담과 교류협력을 진행해야 한다.

8ㆍ15 서울 민족통일대회, 9ㆍ8 남북 축구대회 등 민간행사로 탄력을 받은 남북관계는 대북식량지원 문제를 논의할 2차 서울 경협추진위와 금강산 육로회담 등 하위 당국회담에다 5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 등으로 확대ㆍ재생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과 없는 대화 무의미’ 여론 냉랭

하지만 정부의 시나리오대로 남북관계가 안착하고 햇볕정책이 안정궤도로 재진입할지는 미지수이다.

정부는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짚을 것은 짚겠다’고 밝힐 정도로 강경 대응 방침을 천명했음에도, 이번 실무접촉 공동보도문에 단 한 줄의 서해교전 관련 표현도 넣지 못했다.

이 같은 협상 태도에 대해 한나라당은 “서해도발 사과나 재발방지 약속과 같은 성의 있는 언급이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김 대통령은 임기말 ‘밀어붙이기’식 대북정책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사실 공동보도문에 서해교전이 빠진 것은 상당히 의외였고, 정부가 남북관계 복원이라는 성과에 집착해 또다시 북측에 밀렸다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했다. 남측 대표단이 높이 평가한 북측 대표단의 서해교전 발언내용도 따지고 보면 7월 25일 유감표명의 동어반복이었다.

북측은 여전히 서해교전을 ‘쌍방 책임의 우발적 사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방증했을 뿐이었다. 다만 북측은 남측의 강경 여론을 감안한 듯 8월 3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유감표명은 솔직하고 진지한 태도의 반영”이라면서 종전보다 진전된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현재로선 북측이 서해교전에 대해 보다 진전된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경우 장관급회담도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상황을 반영한 여론의 비판에 휘말려 휘청거릴 수 있다.

북측의 서해교전에 대한 미흡한 해명은 대북 쌀 지원 문제를 논의할 2차 서울 경협추진위에서 ‘대북 퍼주기’ 논란으로, 9월말 아시안게임 때는 북측 대표단 응원 시비까지 이어질 공산이 있다.


대미ㆍ대남 이중플레이가 문제

서해교전 문제가 하반기 남북관계의 바로미터가 되는 이유는 북측이 남측을 배제한 채 북미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이미 서해교전은 북방한계선(NLL)의 불법성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미국과 논의할 태세를 갖췄다. 북측이 8월 1일 전격적으로 서해교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유엔사에 장성급 회담을 제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엔사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인 점을 고려하면, 서해교전 문제가 남북이 아니라 사실상 북미 간에 논의되고 결정되는 셈이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도 8월 1일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미국과 논의할 문제”라면서 논의 주체를 분명히 했다.

이는 남북대화와는 별개로 브루나이 북미 외무장관 회동으로 탄력을 받은 북미대화에서 군사적 문제를 다루는 ‘더블 트랙(double track)’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다.

즉 남측에는 적당하게 유감표명을 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보이면서 실제 재발방지, 책임소재 규명 등의 문제는 미국과 의논하겠다는 식이다.

북측은 북미협상에서 1999년 인민군 총참모부가 일방적으로 선언한 ‘해상경계선’을 원용해 개성 이북의 수역을 모두 자기 수역이라고 주장하면서 NLL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한발 더 나가 정전협정의 원천적 폐기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NLL을 무기로 재래식무기 감축 등 미국이 제시한 의제에 맞서겠다는 계산이다.

우리 군 당국이 교전재발 방지책으로 고려중인 NLL지역에서의 남북 공동어로 문제 등이 엉뚱하게 북미 대화에서 거론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정부의 햇볕정책과 여론이 이 같은 북측의 의도를 포용하고, 적극 활용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결국 향후 남북관계의 순항 여부는 역시 북측의 성의 있는 서해교전 해명 등 대화의지와 맞닿아 있다.

북측이 ‘쌍방 책임의 우발적 도발’ 주장을 되풀이하거나, 남측의 강경여론에 맞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 따로, 실천 따로’ 행태를 보일 경우 임기 말 햇볕정책은 불가피하게 후퇴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국력 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북 포용정책도 북한의 예측가능한 변화가 없을 경우 국민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동준 기자

입력시간 2002/08/09 16:05


이동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