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미국 붙든 北... 특사에 애걸복걸

브루나이서 백남순·파원 '깜짝회동'으로 대화물꼬, 미국대응에 주목

7월 31일 오전 9시10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가 열린 동남 아시아의 이슬람 왕국 브루나이 컨벤션센터.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에드워드 동 한국과장은 회의가 시작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도 눈에 불을 켜고 회의장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동 과장은 뭔가 발견한 듯 로비를 배회하는 북한 외무성 리용호 참사의 팔을 잽싸게 낚아챘다.

동 과장은 저만치 소파에 앉아있는 콜린 파월 미국 국무부 장관을 가리키며 “우리 어른께서 백남순 외무상을 좀 뵙자고 합니다”라고 귓속말로 전했다. 리 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백 외무상에게 무전기로 보고했다.

같은 시각 시내 다른 장소에서 탕자쉬안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고 있었던 백 외무상은 “됐다. 됐어”라며 쾌재를 불렀다. 지난해 1월 조지 W 부시 미국 정부 출범 이후 북미 간 최고위급 접촉이 성사된 것이다. 이날 만남은 그러나 겉으로는 우연한 회동이었지만, 파월 장관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백 외무상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이뤄졌다.


백 “미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백 외무상은 회의장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파월 장관이 앉아 있다는 로비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한 뒤 테이블로 이동, 커피를 마셨다.

파월 장관은 다짜고짜 “최근 북한이 자꾸 유화적인 대화 제스처를 보이는데 진심이오”라고 백 외무상에게 물었다. 백 외무상은 “공화국은 처음부터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파월 장관은 “서해교전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 있겠소”라고 물었고, 백 외무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측과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답했다.

파월 장관이 제네바 합의 이행 및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재래식 군비 문제를 제기하자, 백 외무상은 “우리도 미국처럼 언제 어디서든 만나 이 문제들을 토론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화답했다. 재래식 무기라면 아예 논의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던 북한이 이를 의제로 수용한 것이다.

백 외무상은 이어 서해교전과 북한의 무응답으로 중단된 켈리 차관보의 평양 파견을 재개해 줄 것을 요청했고, 파월 장관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무려 15분간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간혹 백 외무상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북ㆍ미대화에 우리정부 뒤통수

전격적으로 파월 장관을 만난 백 외무상은 2년만의 ARF 회의 참가의 목적을 모두 이룬 듯 자못 의기양양했다. 백 외무상은 남측 기자들이 파월 장관과의 회동 결과를 묻자 “조미(북미)대화 재개에 합의했습니다”고 마치 공식석상에서 선언하듯이 말했다.

반면 전날까지 관례상 남북 외무장관 회담이 선행돼야 북미 회동이 성사될 것이라고 말해왔던 우리 외교부는 무척 당황했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의도한 회동이 아니라 현장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로, 더욱이 비공식 접촉이었다”고 평가절하하면서 “미측이 사후에 접촉 사실을 통보했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백 외무상으로부터 직접 북측의 진의를 파악하겠다던 파월 장관의 적극적인 행보에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논란이 일자 외교부는 “여하간 북미간에 비공식 접촉이 이뤄진 것은 잘 된 일로 본다”면서 북미 ‘깜짝’ 회동을 재평가했다.


‘남ㆍ북은 실내온도만 합의’풍자

북미가 대화재개라는 밑그림을 그렸음에도, 남북 외무 장관들은 한달 전 서해교전의 앙금을 풀지 못한 듯 시종 살갑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ARF 전체회의에서 최성홍 장관과 백 외무상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음에도 끝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최 장관이 에어컨을 가리키며 “공기가 찹니다”라고 말하자 백 외무상이 “너무 춥군요”라고 동의한 게 거의 유일한 대화였다. 이를 두고 현지 소식통은 “남북이 ‘실내온도 합의’를 보았다”고 풍자하기도 했다.

사실 최 장관은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백 외무상의 기피 인물 1호였다. 북측은 미측 언론 보도를 근거로 최 장관이 4월 방미 때 ‘미국의 대북 채찍 정책이 북한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며 해임을 요구했다.

북측은 이를 빌미로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5월 제2차 경협추진위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백 외무상 등 북측 대표단은 남북간 의견 충돌이 예상됐던 서해교전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등 대외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백 외무상은 첫 토론 주제로 한반도 정세가 제시되자 최대 현안인 서해교전에 대해선 언급 조차 하지 않은 채 꼬리를 내렸다.

백 외무상은 “미국의 적대정책과 반테러 전쟁 때문에 한반도 정세가 악화했다”면서 북측 당국의 통상적인 주장만 되풀이했다. 발언권을 넘겨받은 최 장관이 “서해교전은 6ㆍ15 남북 공동선언 정신 위반으로, 국제사회에 큰 우려를 유발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도 백 외무상은 애꿎은 천정만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북측은 남측이 제시한 서해교전 관련 ARF 의장 성명 초안도 거의 수정 없이 수용했다. 북측 김창국 국제기구국 부국장은 “남북이 국제무대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고 우리측 파트너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남북이 이견을 보인 대목은 서해교전에 대한 우려 표명 등 민감한 내용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해 지명 문제였다.

북측 박명구 외무성 참사(차관보급)는 “모두 잘 되는 쪽으로 합시다”라면서 내용에 동의한 뒤 “다만 황해(Yellow Sea)라는 표현 보다는 서해(West Sea)가 옳다”고 말했다. 결국 의장성명에는 서해와 황해가 병기됐다.


북, 켈리차관보 평양 파견 등 대어 낚아

북한의 대미 화해 의지는 미국측이 백 외무상의 ‘대화 재개’ 발표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자 더욱 분명히 표출됐다. 백 외무상은 미 국무부 관계자들이 “시기상조다” “합의는 아니었다” “파월 장관이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결정될 것” 이라고 단서를 달자, 북미 회동을 공식화하고 합의내용을 거듭 강조하고 나섰다.

백 외무상은 8월 1일 미국이 아직 대화재개 합의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거 참, 그 사람들… 켈리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백 외무상은 이어 특사회담 시기를 묻자 “미국이 알지, 내가 알겠냐”라면서 우보(牛步)를 거듭하는 미국측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백 외무상은 언론들의 의구심을 완전히 불식시키려는 듯 파월 장관과의 합의내용을 문서화한 언론 보도문을 배포했다. 보도문은 북미 양측이 켈리 차관보가 부시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평양에 방문하고, 방문 시기는 추후에 확정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북측은 그러나 얼마나 급하게 이 보도문을 준비했는지 백 외무상과 파월 장관의 전체 성명을 쓰지 못했는가 하면, 켈리(Kelly)를 칼리(Kally)로 쓰는 등 오ㆍ탈자를 남겼다.

여하간 백 외무상은 파월 장관과의 15분 회동을 통해 북미대화 재개라는 대어를 낚았다. 미국도 조만간 한국ㆍ일본과 함께 북측의 대화의지를 검토한 후 켈리 차관보의 평양 파견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브루나이=이동준 기자

입력시간 2002/08/09 16:06


브루나이=이동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