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싸리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진홍빛 전령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우리 산야에 마치 배경처럼 피고 지는 그런 나무. 바로 싸리가 아닐까 싶다. 늘어진 가지에 물들 듯 피어 나는 싸리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가 돌아오고 있다.

싸리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성의 키 작은 나무이다. 우리가 산에서 주로 만나는 싸리의 높이는 고작 2m를 넘지 못한다. 줄기에는 둥글고 귀여우면서 가운데 짧은 침이 돋아난 세 장의 작은 잎으로 이루어진 잎이 달리고 그 사이에서 붉은 꽃이 차례로 올라온다.

싸리 꽃은 여름의 끝이 보이는 시점에서 피기 시작하여 가을 내내 잔잔하게 퍼지듯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데 간혹 찬서리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진분홍 빛 싸리 꽃은 아주 작지만 다른 콩과 식물들처럼 나비모양의 아름다운 꽃잎을 가진다.

싸리꽃은 눈에 금새 들어 올 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숲에서 잎과 더불어 어우러져 그저 자연의 일부인듯 느껴지는 그런 꽃이다.

우리는 흔히 싸리라고 부르지만 사실 싸리의 종류는 아주 많다. 특히 참싸리는 싸리와 너무나 흡사하다. 참싸리는 꽃차례가 짧아 잎보다 작은 반면 싸리는 잎 밖으로 화서가 더 길게 나온다. 역시 콩과이니만큼 열매도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작지만 꼬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싸리가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나무인지는 싸리골, 싸리재, 싸릿말 등 ‘싸리’라는 말이 붙은 지명이 전국에 지천으로 많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고개와 마을과 계곡들이 모두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겠는가.

옛 사람들의 생활로 들어가면 싸리는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싸리를 베어 만든 싸릿문이 있다. 싸리는 또 흙벽의 심지가 되어주기도 하고, 무엇이든지 담아 두고 말려두고 하는 소쿠리와 채반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중 바느질도구를 넣으면 반짇고리, 엿을 넣으면 엿고리가 되는 물건을 담아 두는 상자를 칭하는 고리는 싸리로 통을 엮고 여기에 종이나 헝겊을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농사지을 때 꼭필요한 삼태기, 술을 거를때 쓰던 용수라는 그릇, 본래 곡식을 고를 때 썼지만 오줌싸개 아이들이 소금을 얻으러 가며 쓰던 키, 곡물을 저장하는 채독, 병아리가 매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덮어씌우는 알까리, 고기를 잡던 발, 무엇보다도 군대생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싸리빗자루와 싸리줄기를 잘라 만든 가는 회초리…

한방에서는 목형, 형조라고 하며 열을 내리고 이뇨 효과가 있어서 기침, 백일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거나 임질에 걸렸을 때 썼고 꽃이 넉넉치 않은 시기엔 꿀이 풍부하여 훌륭한 밀원식물이 되며 새순이나 어린 잎 또는 꽃을 무쳐먹기도 한다.

숲이 우거진 탓인지 우리 마음이 싸리에서 떠나서 인지 요즈음은 흐드러진 싸리꽃 구경도 그리 수월치 않다. 싸리 꽃 찾아 아주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향기를 느끼며 올 여름을 떠나 보내고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입력시간 2002/08/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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