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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대금 이생강

국악을 대중속으로 끄집어 낸 입김의 예술

풀잎이든 나무로 만든 대롱이든 그의 입김을 거치면 예술이 된다.

대금, 단소, 피리, 태평소 등 전통 국악 관악기는 물론 플라스틱 관에 구멍 몇 개만 뚫어도 피리 소리를 낸다. 구성지고 애절한 가락은 민족과 이념의 경계를 뛰어 넘는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5호(대금 산조)로 지정된 이생강(66)은 천의무봉의 연주력으로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문화재 지정 기념으로 2001년 2월 발매했던 연주집 ‘추억’에는 40년 외길을 걸어 온 그의 인간적 체취가 가득하다. 정통 대금 산조를 변형시킨 창작곡 ‘추억의 소리’를 필두로 ‘황성 옛터’, ‘타향살이’ 등 옛 가요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 ‘칠갑산’ 등 최근 히트곡까지 망라했다.

‘서머 타임’, ‘오, 대니 보이’ 등 여흥으로 즐겨 연주하던 서양의 소품들까지 수록돼 있어 동서를 뛰어 넘는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 온 그의 풍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덕택에 지금까지 음반만 400종이 넘는다. 국내 음반사는 물론 도시바나 브리태니커 등 해외 음반사들도 그의 음악에 손 내밀었다.


퓨전바람의 진원지

1998년의 앨범 ‘희망가’는 신관웅(피아노), 김희현(드럼) 등 국내의 대표적 재즈인들과 추억의 가요를 연주했던 작품이었다.

국악기록보존연구소 노재명 소장은 “국악, 재즈, 트로트가 서로 조화를 이룬 빛나는 작품”이라며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의 한 장을 열었다”고 평했다. 원일 등 젊은 국악인들이 새 시대 국악의 모습을 두고 어떤 형태의 퓨전이 돼야 할 지 탐색하고 있던 와중에서 국악계의 어른이 보여 준 이 같은 혁신적 모습은 뭣보다 큰 격려였다.

이후 국악인 사이에는 국악과 타 장르 음악이 섞여 만든 퓨전 붐이 불었다. 후배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1997년 국립국악원에서의 ‘계보 발표회’ 뒤풀이 장에서는 뜻밖의 언급이 있었다. 국악계의 어른으로 입바른 소리 잘 하기로 소문난 명창 박동진이 운집해 있던 국악계 후배들에게 “요즘 느그들 하는 것은 이생강이 다 해 놓았다”며 그의 음악적 진보성을 승인한 것이다.

이생강은 “TV 국악 프로를 녹화할 때 정규 시간이 끝나고 난 뒤 팬 서비스용으로 뽕짝을 국악기로 연주해 주면 운집한 관객들이 뒤집어지고 마는 현실을 모른 체 하지 말자는 말씀이었다”고 기억한다. 유아독존식의 예술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만의 아성에 갇혀 있지 않고 요즘 현실을 호흡하는 것은 늘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사는 덕이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 자택은 그의 전수소이기도 하다. 현재 30명의 전수생들은 물론 구청 직원이나 일반 교사 등 직업인들까지 틈틈이 그를 찾는다. 수업은 1대 1이다. 이생강은 나이 어린 제자가 이마에 핏대를 세워 가며 부는 태평소 가락을 더 편안하고 구성지게 불어 보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 도입부로 잘 알려진 태평소 가락 ‘능게’다.


대금을 솔로이스트 악기로 격상

8월 말 발간될 그의 저서 ‘단소 교본’(솔과학)의 마무리 교정 작업에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악 연주 입문용으로 쓰여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하던 악기가 거장의 해설로 재조명된 것이다.

국립창극단 최종민 단장은 “기초부터 고급 수준까지 명인의 노하우가 곳곳에 스며 있다”고 평했다. 그는 이 책과 함께 5년 전 특허를 받은 보급용 PVC 단소도 널리 보급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60년째 불고 있는 자신의 단소를 모델로 해 그대로 떴다. 새 단소로 책 속에 나오는 곡들을 연주해 수록한 CD도 2장 부록으로 들어 간다.

이생강은 대대로 국악인 가족이다. 고종 때 감찰사까지 지낸 집안의 억압적 분위기를 뛰쳐나와 트럭을 몰며 경남 일대의 장터를 누비던 아버지 이수덕은 관악기라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주하던 재주꾼이었다.

자연스럽게 소년 이생강은 어려서부터 손에 잡히는 대로 관악기를 불게 됐다. 어물이 가득 실린 트럭 짐칸 위에 앉아 짧은 가락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절로 모여 들었다. 스승 한주환도 이때 만났다. 부친은 전주역 앞 장사꾼들이 묵던 곳에 우연히 들른 한주환의 봇짐에 대금이 꽂혀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단짝이었던 동생 이성진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는 항상 아쉬워 한다. 꽹과리, 장고 등 타악은 물론 상모 돌리기까지 통달했던 그는 뇌졸중으로 46세에 세상을 뜨고 말아 형의 장단을 더 이상 맞춰 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외아들 또한 국악인이다. 9세 때 단소로부터 시작해 아버지가 연주하는 악기들을 모두 다루는 외아들 이광훈(37)은 “아버지는 부는 것에는 신선”이라고 잘라 말한다.

기량을 인정 받아 1992년과 1993년 잇달아 카네기홀에서 대금 산조 독주회를 가질 정도의 그는 그러나 “아직 스승과 학생의 차이”라고 아버지와의 실력을 비교한다. 대금을 반주용 악기에서 솔로이스트의 악기로 격상시켰던 아버지의 기량을 넘볼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 국악계에 회자됐던 “한국 악사는 이생강만 있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은 그때의 정황을 잘 전달해 준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당시 한국민속예술단 소속으로 해외 공연을 나서면서 그의 대금은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등 독주용 악기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국하고 나면 보나마나 서양악기 뒷전만 서게 될 국악인들의 처지가 눈에 훤했다. 서구의 것만 좇으려던 당시 일반인에게 국악은 너무 떨어져 있었다.


국악 대중화로 한계 뛰어넘기

국악 대중화가 그의 답이었다. 이미 1950년대부터 가요와 팝 등 타 장르와의 접합, 대금의 옥타브 파괴, 반음 표현 등 국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를 해 왔던 그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이생강은 한때 국악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큰 회의를 품었다. 서양 음악만 알아주고 국악은 저잣거리에 굴러 다는 음악 정도로만 여기던 청년 시절부터의 풍토에 국악인은 빌어 먹고 살기에 딱 좋았다.

거기에는 당시 국악이라면 전라도 음악이 주류였는데 자신은 경상도 음악을 한다는 데 대한 열등 의식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그가 내린 대안은 국악의 변신이었다. 요즘 말로 크로스오버다. 이생강은 국악을 중심으로 한 크로스오버의 출발점이다.

그는 “국악이 점점 사양화돼 가는 상황에서 내 음악이 과연 어디까지 살아 갈 수 있는지를 놓고 벌인 실험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반전됐다. 이것저것 조합해 무수히 변종만 생산하는 요즘 국악계의 풍토는 너무 즉흥적이라는 걱정이 든다.

그가 후학도에게 들려주는 황금비가 있다. ‘전통 음악 1시간에 창작곡 1시간’이라는 법칙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온고이지신’이라는 진리가 점점 희석돼 가는 최근 풍토에 대한 우려다.

그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매사를 또박또박 철저히 챙기는 그의 습성 때문이다. 첫 스승의 생몰 일시를 양력은 물론 음력으로도 꿰고 있다. 이생강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은 그의 성실하고도 소탈한 자세에 인간문화재라는 거창한 칭호를 깜빡하기 일쑤다.

늘 젊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떠들썩하게 말을 주고 받는 그의 모습은 이웃 할아버지다. 중앙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출강중인 그는 “서양악에 비해 항상 뒷전 신세였던 국악계의 위치 향상을 위해 숨이 붙어 있는 한까지 애쓰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학생들의 기초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국악예고 강의는 1960년대 이후 죽 해왔지만 이제는 더 주력할 작정이다. 1주일 4번 손자뻘인 중등부 학생에게 들려주는 ‘대금산조’ 강의는 같은 길을 택한 외손자 윤덕제(국악예술중1) 에게 들려 주는 기분이어서 늘 새롭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2002/08/1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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