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태극기를 사랑한 화가, 김명수 화백

가슴에 품은 태극의 멋과 恨

경기도 안성 남풍리의 한 산꼭대기에 오르면 외딴 집 한 채가 앉아있다. 화가 부부가 사는 이 집에는 연중무휴 태극기가 나부낀다. 폭우가 오든, 천둥이 치든 깃발은 자리를 뜨는 법이 없다. 아래 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면 산 속 등대처럼 서 있다.

언젠가 이 태극기 주인에게 친구가 물었다. "봐 줄 사람도 없는 데 뭐하러 혼자 태극기를 달아? 화가의 대답은 "내가 내게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1972년 최초로 태극기 작품시도

집주인은 서양화가 김명수(56) 화백이다. 김화백은 1972년 최초로 태극기 작품을 시도한 작가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도록 태극기를 가슴에, 작품에 담아왔다. 요즘도 태극기 얘기만 나왔다하면 그를 찾는 기자나 PD들이 많다. 그러나 그 손님들이 모두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김화백은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 6월 월드컵이 그의 상처를 덧건드려 놓았다.

"태극기로 옷이나 두건 등을 만들어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이를 태극기 모독이라 부르지 않았을겁니다. 아마도 3.1 독립운동 이후 최고의 태극기 물결이었다고 할 이 현장을 TV로 보면서 저는 한편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습니다.

30년전 작가로서 우리 태극기의 조형미에 반해 만들어놓은 제 설치작품은 전시도 못한 채 폐기당했습니다.

사상 불온자라는 의심까지 받아 고초를 겪었습니다. 사상불온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지난날 작가로서 당한 불이익에 대해 이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빼앗긴 권리를 이제 되찾으려고 합니다. 흥미거리로 제 이야기를 실으시겠다면 죄송하지만 취재를 거절하겠습니다."

보상의 방법까지 생각해두었다. 권위의 상징에서 사랑스러운 표상으로 사람들 가슴속에 파고든 역사의 현장, 광화문 또는 시청앞 거리에 30년전 무조건 차단당한 자신의 태극기 설치작품을 브론즈로 제작해 영구히 세우는 것이다. 그 제작비와 설치비를 국가가 부담하라는 것이 김화백의 요구 전부이다.

그의 인생에 '태극기 사건'이 벌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오늘과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던 전도유망한 청년작가였다.

고향인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닐때부터 큰 미술대회마다 죄다 휩쓸어 타 학교의 미술교사들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 3학년때, 한국일보가 주최해 당시 미술인들에게 민전으로는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입선했다가 곧 나이제한 규정을 어긴 사실이 들통나면서 상이 취소된 일이 있다.

김환기 선생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대상을 수상한 해였다. 같은 대회에 재도전해 또한번 입선한 것이 대학 4학년때.

그러나 원래 대상작으로 결정됐다가 당시 심사위원의 제자인데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오히려 '역차별'을 받아 부득이 입선작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다른 심사위원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기발한 발상과 접근법으로 항상 화제

그림에 관한 한 그는 발상이나 접근법부터가 독특했다. 고교때 사생대회에 나가 그린 그림은 채색 재료부터가 자신이 직접 개발한 것이었다. 여느 학생들처럼 수채물감을 물과 섞어 쓰지 않고 대회 전날 밤 집에서 밤새 끓여 만든, 아교를 묽게 풀어 끓인 용액을 사용했다.

물이 흐르는 성질을 빨리 중단시켜줄뿐 아니라 발색 효과도 좋아지는,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었다. 틀에 박힌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입선한 작품에도 자신이 만든 기발한 재료가 쓰였다. 은가루와 화공약품을 섞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수상이 결정된 뒤에도 심사위원은 "앞으로는 이 표현재료를 계속 쓰라"며감탄과 독려를 보냈다.

화공약품에서 나오는 유독성 냄새에 중독된 것도 모른채 그는 의사의 위험경고를 받기전까지 한동안 이 자작재료에 매료돼 있었다.

표현주제나 기법도 매양 변화무쌍했다. 자신의 그림에 틀이 생기는 것을 스스로 못견뎌했다. 남들처럼 백지나 캔버스에 얌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팜플렛이나 광고지 등 기인쇄된 종이를 이용해 그 위에 나온 형상까지 재치있게 끌어들여 자신의 그림으로 재생시키고는 했다.

한때 1천개의 얼굴을 그려 화제를 모은 적도 있다. 지금껏 개인전 19회를 열면서 단 한번도 비슷한 성격의 전시회가 선보인 예는 없었다. 그를 오래도록 지켜본 한 미술평론가는 "김명수가 전시회를 한다면 이번에는 또 무엇을 들고 나올까 궁금하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가 상주(喪主)가 되었을때 장례후 친구가 몸에 걸쳤던 상복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괴짜작가, 술을 마시다 말고 술안주로 나온 노가리포 위에 정신없이 그림을 그려대는, 무섭도록 창작욕구가 강한 사람.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가 국내에 알려지기도 전에 그는 유사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력 등, 그의 미술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지도, 박제된 적도 없다.

1972년 문제의 태극기 작품이 나온 것도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연장선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비친 태극기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진 게 없다.

"별난 애국자라서 태극기를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애국은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이처럼 심오한 상징체계를 갖고 있으면서 조형적으로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국기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시각에서도 우리 태극기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도 우리는 우리것을 무조건 얕보는 의식 때문에 그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겁니다. 애국하기 위해 태극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태극기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것이 애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반체제 불온으로 몰린 작품

한국미술협회에서 주관한 첫 번째 앙데팡당전이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다. 그는 청,홍의 둥근 형태와 그것을 감싸는 검정선 등 태극기의 남다른 조형미와 그에 깃든 태극사상에 한창 심취해있던 때였다.

이것이 곧 작품으로 이어졌다. 방법은 크고 작은 여러개의 태극기를 각각 자루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모래를 담고 전시장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의 완성될 무렵, 주최측에서 갑자기 작품을 철거하기를 요청했다. 전례없는 이 태극기 설치작품이 자칫 말썽을 부를 소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끝까지 버티며 어떻게든 작품을 관철시키려 애썼지만 결국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태극기 대신 화장지를 길게 늘어놓고 전시장을 돌아서 나오며 스스로 날개가 꺾인 새라는 생각을 했다.

처진 어깨로 미술관 문을 벗어날 무렵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검은 안대로 그의 눈을 가리고 지프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가 시도한 태극기 작품에 국가체제 반대의 불온사상이 깔린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며 험한 육두문자로 혹독하게 그를 추궁했다. 한참의 항변뒤 고초에서 풀려났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작자가 원하는 작품도 마음껏 만들 수 없는 현실, 그는 곧 부산으로 낙향해버렸다.

이후의 지리멸렬한 삶. 술과 함께 허송세월을 보냈다. 생활을 위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입시화실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며 더더욱 자신의 창작시간을 잃어버렸다.

지난 태극기 작품때의 상처를 만회할 기회가 또한번 찾아왔지만 그것 역시 상처를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스스로가 재미없어서라도 비슷한 작품을 두 번 반복하지 않는 그가 1988년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열린 바다미술제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룰을 깼다.

16년전 좌절됐던 바로 그 태극기 설치작품을 복원함으로써 어떻게든 한을 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치를 마친 뒤 잠시 쉬었다 돌아온 30분 사이에 깜쪽같이 작품이 사라졌다. 작품의 무게나 규모상 집단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가능치 않았을 일이었다. 거세게 항의하는 그에게 주최측에서는 며칠간 범인을 찾아 수소문하는 듯 하더니 곧 "참으라, 그냥 없던 일로 치라"며 술만 권할 뿐이었다.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세계적 위상도 아랑곳 없이 태극기에 대한 맹목적 터부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마침 구경왔던 사촌형이 우연찮게 찍어둔 한 장의 사진만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았다.

" 가까스로 마음을 잡고 다시 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집사람 덕분이예요. 방황하는 제게 늘 '당신은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계속 용기를 불어넣어줬어요. 집사람도 같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던 후배였는데, 결혼 후 저를 위해 자신의 공부도 접었어요."

1996년 서울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그는 지역활동을 접고 다시 중앙권역으로 들어왔다. 태극기 작품의 후유증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나기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된 셈이다.

안성 남평리의 산 속에 들어와 산 것은 1999년부터다. 문패처럼 사시사철 태극기를 옥상에 걸어놓은 채 이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나무도 심는 등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고립되기도 하고 여름이면 족제비, 고라니가 심심찮게 나타나 부부를 놀래키기도 하지만, 이들은 한번도 적적해하거나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김화백에게는 그림이 있고, 아내 이옥자씨에게는 김화백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잠든 새벽이면 김화백은 혼자 깨어 새벽 너댓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태극기 상품 꿈꿔

사과와 구름바위, 태극기는 김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다.

특히 태극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리거나 만들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 쌓였다. 사실상 태극기 설치작품을 내놓았던 당시에도 그는 집안에 태극기 커튼까지 만들어 걸었었다. 그에게 고통을 상기시킨 월드컵때의 태극기 열풍은 어쨌든 그에게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었다.

미국 성조기로 만든 멋진 옷을 볼때마다 늘 부러웠습니다. 이제는 우리 태극기도 그 선이나 원, 색채 등을 정확한 계산에 맞춰 멋지게 디자인하면 옷이든, 포장지든, 베개든 무엇이든 세계 상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 태어날겁니다.

그의 미술작품 속에서도 태극기는 평생을 두고 쫓아갈 소재다. 최근에도 6월의 태극응원물결에 어릴적 딱지를 결합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갈 일이 얼마나 부산하든,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너무 앞섰기에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화가, 내 권리를 찾겠다 외치는 김화백곁에서 주인처럼 완고한 태극기가 오늘도 변함없이 펄럭인다. 단호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8/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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