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눈물젖은 '그 맛' 누가 알랴?

예전엔 TV를 보다가 밤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어린이들은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그때까지 TV 앞에 붙어있던 아이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자야 할 시간임을 주지시켰고 아이들은 불만스럽지만 대단한 TV가 시키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억지로 눈을 감고는 했다. 어른들 또한 아이들을 재우면서도 어른들 역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강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지극히 계몽적이고 어떻게 보면 권력의 독선적인 지휘행태 같기도 한 이 기묘하기만 했던 안내방송 때문에 전국민이 세뇌당하다시피 일찍일찍 잠자리에 든 것도 사실이다.

지금 이 방송을 다시 시작한다면? 글쎄,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아하, 이제부터 재미있게 놀라는 말이구나’ 하는 자명종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일반적인 국민들이 집으로 귀가해 잠자리를 준비할 시간이 바로 연예인들에게는 새로운 활동의 시간이다.

낮에 방송국에서 하루종일 녹화에 시달리다가 밤이 되어 늦은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 혹은 조금은 긴장에서 풀려나 휴식을 취해보는 시간이다. 그래서 새벽 2시에 신사동의 간장게장을 잘한다는 음식점이나 아구탕 집에서 유명 연예인들을 보는 일도 드물지 않다.

연예인들이 낮에는 대중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까 밤을 선호하는 이유도 있지만 밤이 더 분주하고 활동영역의 연장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밤무대 출연 탓일 것이다. 연예인들에게 밤무대는 무척이나 중요한 수입원이다. 소위 말해서 인기가 있는 즉 떴다는 실감이 드는 순간이 바로 밤무대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그 건수에 의한 확인일 것이다.

어느 연예인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시내와 서울 근교를 합쳐 하룻밤에 9군데를 뛰기도 했다. 하룻밤에 몇 군데씩 뛰자면 몸도 피곤하지만 무엇보다 연예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술 취한 손님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술취한 손님들이 그저 스타를 놀려먹기 위해 사실이 아닌 얘기를 떠들어대도 모른 척 하며 지나가기도 하지만 몇몇은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맞상대를 하다가 멱살까지 잡고 싸우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특히 부부 연예인인 경우 참 듣기 민망한 막말까지 들어야 하는 일도 있다. 부부 연예인인 A가 밤무대에 출연했을 때였다.

무대에 올라 한창 흥을 돋구고 있는데 만취한 손님이 역시 같은 연예인인 아내 이름을 들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000 먹었었다.”

가는 밤무대마다 어김없이 “야, 니 마누라 000 내가 먹었어” 하는 소리에 처음엔 하도 분하고 억장이 무너져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허구한 날 상대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도 무대에 올랐는데 어김없이 ‘000 먹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 지치기도 하고 여유도 생긴 A가 말했다.

“니가 암만 그래도 내가 000이 더 먹었어. 아무래도 결혼한 놈이 더 먹게 되있는 거야.”

A가 참지 못하고 반말로 맞상대를 한 것이 요즘 젊은 연예인의 정서라면 지금은 고인이 된 B는 시절 탓인가 좀더 점잖고 예의가 발랐다. 수십년전 같은 연예인과 결혼한 B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술취한 손님이 짖궂게 물어왔다.

“ 000 맛있냐?”

그러자 B가 마이크를 잡은 채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 네. 맛있습니다.”

대중을 울리고 웃기는 게 연예인의 직업이긴 하지만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스타의 약한 모습을 조금은 격려해주자.

입력시간 2002/08/2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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