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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한국에 중국을 심는 여자, 이가춘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중국인

한국의 중국 여인 이가춘(47)의 작은 모험이 시작되었다. 올해 7월 그녀는 서울 목동에서 중국어문화원을 열었다. 중국문화원이 없는 한국에서 학원 겸 스스로 민간 문화사절 노릇을 떠맡고 나선 곳이다.

20여년 경력이 쌓인 대학생, 직장인 강의를 두고 주부와 어린이 교육에 유난히 애착을 보이는 것도 그 증거 중 하나다. 다소 이르지만, 들뜨지 않은 확신이 그녀에게 있다.

“이 문화원을 하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투자하는 분들도 다들 망설였어요.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분명히 희망은 있어요.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아이들이 자라서 장래에 한국과 중국 사회를 위해 저마다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실제로 정식 개원을 하기도 전에 문을 연 첫 날부터 50통이 넘는 문의전화를 받았어요.”

이곳의 수업이란 것도 어학실력 쌓기만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 흔한 ‘단어나 문장 몇십번 쓰기’ 숙제는 아예 없다. 공부하듯, 놀 듯, 쉬엄쉬엄 중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로 편안하게 가르치고 배운다.

중국의 문화와 친해지게 하는 교실이다. 공부라면 질린 아이들도 이곳에서는 수업시간 전부터 찾아와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일이 많다.


서울태생의 베테랑 중국여강사

이씨는 중국 국적을 가진 베테랑 중국어 강사다. 1980년대, 당시 국내에 유일하던 YMCA 중국어회화 강좌를 맡기 시작해 1990년대 동국대 서경대 등 여러 대학에 출강했다. 1996년에는 영서대에서 주임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독일어와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국적을 따지기 미안할만큼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중국인이다. 달변의 한국어 실력은 물론 한국 문화와 역사에도 해박하다. 태어나기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중국 산둥성이다. 부친은 생전 한국에서 지업사를 운영한 사업가였다.

이씨는 중학교때까지도 어머니와 언니들과 함께 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살다가 고교때부터 한국에 정착,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진입했다.

한국말을 배운 것도 고등학교때부터였다. 한성화교학교 시절, 이방인으로서의 반갑지않은 경험도 많았다.

학교 밖만 나서면 ‘짱꿰이’라고 놀려대던 동네 아이들, 어쩌다 건널목 등지를 건너다 경찰에게 걸려 신분증을 보여주면 맨 먼저 건너오던 ‘뙈놈’이란 말, ‘우리나라도 먹을게 없는데 왜 너희가 여기에 사느냐’는 식의 모욕, 그런 순간들이 싫어 그녀는 오랫동안 일부러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1971년 화교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한국 고전을 공부한 뒤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모국어가 중국어인만큼 한문에 대한 자신감속에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이것이 섣부른 오산이었다는 것을 입학후에서야 알았다.

“당장 한국말로 된 강의 자체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입학하기전만 해도 저는 한국영화를 보면 90%를 이해하고 평소 한국인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전혀 막힘이 없을 만큼 한국말에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생활언어랑 학문에 쓰이는 말이랑 다르다는 것을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강의를 듣고 있어도 무슨 내용인지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한 귀로 그대로 다 빠져나가는거예요. 듣긴 듣는데 아무것도 머리에 저장이 안되는 거죠. 내가 참 무리한 모험을 했구나, 그때부터 내내 공부가 너무나 힘들었어요. ”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힘들어하는 이씨에게 한 친구가 더 아픈 일침을 던졌다.

‘네가 중국어나 한문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한국 역사도 모르면서 과연 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당장 14권짜리 한국사 책을 사들고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년이 넘도록 채 2권을 읽지 못했다.

역시 내용이 어렵고 딱딱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결국 한 친구의 도움으로 어린이용 한국사 도서 70권을 얻은 뒤 한달만에 완전 독파, 자신감을 얻은 후 점점 난이도 수준을 높여가는 방법으로 마침내 역사실력을 따라잡았다.

이화여대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해 예술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노장사상,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고는 못 살던 악바리 같은 성격이 대학생활 이후 어느새 완연히 변해있었다.

대학원 재학중 YMCA 중국어회화 강의를 맡으면서 강사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이 강의를 듣기위해 지방에서도 수강생들이 찾아올 만큼 인기가 높았던 강좌다.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후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이 몰고 온 세계화 열풍과 함께 중국어학원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이씨는 20여년간 학원가와 대학가를 바쁘게 누볐다.

어머니와 두 언니는 1980년대에 한국을 떠나 대만에 정착했다. 평생 한국을 사랑한 부친과 마찬가지로 이씨 역시 이미 익숙하게 길들여진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이 제2의 고국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10년전인 1992년 이맘때 역사적인 한중수교의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같은 중국인이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또 다른 설움의 시간이었다.


한중수교 후 한국에 실망하기도

“처음에는 기뻤었어요. 이제 우리도 중국에 가 볼 수 있겠구나 하구요. 그런데 곧 대만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지요.

‘이제는 중국을 받아들이게 됐으니까 너희 대만인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도 들렸고, 실제로 한국의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들어왔던 대만인 교수들이 다시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졌어요.

제가 있던 학원에서도 대만출신 강사들이 여럿 쫓겨났어요. 중국과 수교를 맺은 다른 나라에도 이런 일은 없는데,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교육기관에서 이럴 수가 있을까, 몹시 힘든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대해 실망을 느꼈어요.

그런 저희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 건 오히려 평범한 시민들이었어요.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이나 학부모님들만 해도 ‘혹시 무슨 불이익이라도 생기면 당장 우리 호적에 올려주겠다’고까지 하면서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어요. 원래 한국 사람들이 쉽게 흥분하는 기질인걸 잘 아니까 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마음을 다지곤 했어요.”

중국어문화원을 열게 된 것은 코미디 같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1년 6개월전, 그녀는 종로에 개인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어느날 이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사무실로 한 114교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번호를 등재할 때 명시할 이곳 단체의 이름을 가르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씨의 부재중 전화를 받은 직원이 “특별한 이름이 없다”고 하자 “그럼 중국어문화원으로 올리면 어떻겠냐”고 교환원이 즉석 제안해 이에 직원이 동의한 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사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문화원으로 전화번호부에 이름이 오른 후, 이씨의 사무실은 매일마다 전국에서 밀려드는 중국관련 각종 문의전화로 몸살을 앓았다.

중국의 국기가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에서부터 중국현지의 지역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는 지방 사업가, 중국 의상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학생 등 이씨의 본업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질문들이었다. 본인의 부재중 난데없이 떠맡은 이름 하나 때문에 이씨는 꼼짝없이 실제 중국문화원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전혀 싫지가 않은거예요. 오히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신나고 즐거웠어요. 제가 모르는 걸 물어오면 일부러 찾아서라도 꼭 알아내 알려줄 정도로요. 중국 의상도 대학에 출강할 때 학생들 공연을 위해서 대만까지 가서 제 돈으로 장만해 입힌 옷들이 여러벌 있었는데 그 옷도 조건 없이 그냥 다 빌려드렸어요.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도와드린 분들이 연신 제게 ‘고맙다’고 말하는 그 인사 한마디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서 점점 더 그 일을 열심히 해주게 되더라구요.”

이씨의 딜레마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요즘도 사업가로 치자면 그다지 계산에 밝지 못한 사람이다. 유학을 가겠다고 찾아온 상담자들에게 오히려 “유학을 가지 않는게 좋겠다”며 제 손으로 말려 돌려보내기도 했다.

막연한 환상만으로 무모한 고비용 모험유학을 하려는 젊은이들의 경우다. 유학원도 운영하는 그로서는 의당 한 사람이라도 유학생을 더 유치하는 것이 수입원 확보에 도움이 되지만, 어쨌든 이씨에게는 그것이 안된다.

“가지 말라고 말해주는 분은 처음 만났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상담자들을 배웅한 뒤, 혼자서 문득 헷갈리기도 한다. ‘너, 왜 이러냐?’ 분명한 것은, 당장의 돈보다 진정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욕구가 그녀에게는 강하다.

진작 본국에 들어가 정착한 중국친구들의 성공소식을 들을 때면 때로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가족과도 떨어진 채 왜 굳이 한국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반문이다. 얼마전부터 그 답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문화가교역할 하고 싶어

“종교인은 아니지만, 아마도 하늘이 제게 뭔가 한가지 일을 크게 시키려고 이제껏 제게 그렇게 힘든 길을 거쳐오게 한 것 같아요. 그간의 경험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 이 문화원을 준비하면서 강사나 건물을 구하는 문제 등등 그 어떤 일도 전혀 두렵거나 어렵게 느낀 것이 없었거든요.

제 생애에 맡겨질 한가지 일이 정확히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지금의 이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은 조금씩 들어요.

우선은 이 일을 잘 해 놓은 뒤 나중에는 중국에도 한국어학원이나 한국박물관을 만들어서 중국에서도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가까이 맞을 수 있도록 두 나라의 문화를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얼마전부터는 한국사를 중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유적지로 알아보는 한국역사’라는 제목의 이 책은 고조선시대부터 시작해 현재 신라편까지 완성된 상태다. 답사여행은 그녀의 필수작업이자 오랜 취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숨결이 담긴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다. 줄곧 일에 몰두하다 보니 지금껏 미혼이다. 결혼기피자는 아니지만 혼자라고 늘 외로운 것도 아니다.

“얼마전 주위에 ‘내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었더니 ‘참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안심했어요. 비록 늘 공부와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느라 친구도 다 달아나고, 워낙 모임에 나가지 못해 가끔 오해도 사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제 일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일이 제게 우선이었고, 특히 일에 대해서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구요.”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2/08/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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