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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은 잿밥에만…南은 과실에만

남북 장관급 회담, 10개항 합의문 불구 가시적 성과없는 '절반의 성과'

“우리 어른께서 8번이나 합의한 일을 또다시 실천하지 못해 무척 섭섭해 한다고 귀측 최고지도부(김정일 국방위원장)에 꼭 전해주시오.”

8월 14일 오후4시10분 서울 신라호텔 2층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장. 남측 수석대표인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물린 뒤 북측의 고지식한 협상 태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 장관은 북측 단장인 김령성 내각 책임참사에게 “또다시 은전을 베푼다는 식으로 회담에 임한다면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직설적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북, 군부관련 사안엔 재량권 전무

이번 장관급 회담은 10개항의 합의문을 내놓는 등 겉으로는 풍성한 성과가 있는 듯하지만, 경의선 연결사업의 개시를 보장하는 군사실무회담의 일시를 확정하지 못함으로써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남측은 6ㆍ29 서해교전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북측은 진전된 사과를 할 의사가 아예 없었다. 북측 김령성 단장은 서울 도착 직후 “나는 선물을 많이 갖고 와서 많이 남기고 가는 사람”이라고 큰 소리쳤지만, 군부가 관여하는 사안에 대해선 일말의 재량권도 행사하지 못했다.

엄밀하게 보면 북측은 경의선 연결 사업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남북은 같은 제목의 공동보도문을 발표했지만 비무장지대(DMZ) 내 군사보장합의서 서명을 위한 군사실무회담 개최 부분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남측 합의문에는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한다”고 명시됐으나 북측은 “군부에 건의한다”고 발표했다.

정부 당국자는 “단지 표현이 다를 뿐”이라고 무마하려 했지만, 북측의 표현은 사실상 하기 싫다는 의미라는 게 중론이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남북이 경의선과 동해선을 동시 착공한다고 원칙적인 합의를 본 것이다. 이제 겨우 운을 뗀 수준인 동해선에 맞춰 경의선을 착공하므로 그 만큼 연결이 지연되는 셈이다.

사실 경의선 연결은 이번 회담의 최우선이자 최소한의 목표였다. 경의선은 DJ햇볕정책의 가장 확실하고도 가시적인 성과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정부는 4개월이면 족한 DMZ 및 북측지역 공사를 8월 안에 시작해 연말에 개통할 각오였다. 때문에 북측이 이 사안에 소극적으로 임하자 남측 협상팀 일각에서는 “알맹이 빠진 회담은 곤란하다”면서 결렬을 주장하기도 했다.


철도연결은 여전히 ‘평행선’

결국 북측 대표단은 수 차례 본국 훈령을 전달 받고 내부 조율을 한 끝에 회담 마지막 날 군사실무회담 개최 일정을 확정할 수는 없으나, 26일부터 열리는 경협추진위 2차 회의에서 경의선 착공시기 일정 등을 확정하자는 양보안을 제시해왔다.

또 당초 아예 거론조차 말자던 군사당국자(국방장관) 회담도 이른 시일 내에 개최하자는 방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북측의 협상 태도를 감안하면 경의선 연결은 다음 정권의 숙제가 될 공산이 커졌다. ‘실천하는 회담, 구체화하는 회담’을 강조했던 정부가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해 서해교전, 대북쌀지원 등 유리한 카드를 활용하지 못하고 북한에 또다시 끌려 다녔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북측은 이번 회담에서 비군사적 사안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체제 유지를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의 첫걸음이 될 경의선 연결은 여전히 부담이 됐던 것이다.

경의선 연결을 위해 DMZ에서 공사를 하려면 공사를 책임진 남북한 일선 공병부대 사이에 핫라인을 개설하고, 남북한이 동시에 DMZ의 철조망을 걷는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성이 큰 행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북측 대표단에는 북한군 인사가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설사 이번 회담에서 일정을 합의했더라도 북한 군부가 거부하고 나설 경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북측은 대북 쌀 지원 문제에 관한 한 상당히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봉조 통일부 정책실장은 “회담에서 쌀 지원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고, 이 문제는 경협추진위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공식적 수사라는 게 정설이다.

식량문제는 북측의 최대 관심사인데다, 회담의 다른 의제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측은 경협추진위에서 확정될 사항을 미리 점검하고, 공동보도문 작성에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측도 올 초 한차례 여론의 ‘사전 검열’을 받았던 정부보유미 30만~50만 톤 지원 방안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정부, 경의선 연결ㆍ식량지원 ‘빅딜’추진

정부는 26일 서울서 개막하는 경협추진위에서 경의선 연결과 대북 식량지원을 놓고 ‘빅딜’을 시도하겠다는 각오이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16일 “쌀 문제는 경협추진위에서 다른 사안과 연계돼 논의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즉 북측이 경의선 연결 사업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경우 쌀 지원을 유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관측통은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쌀 지원을 예정대로 추진한다 하더라도 경의선을 따내지 못하면 여론의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번 장관급 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최소한 10월까지는 숨돌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게 됐다. 이미 17일부터 북측의 아시아경기대회 참가결정에 따른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실무협의를 하고 있다.

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ㆍ응원단ㆍ예술단을 합쳐 최소 500명에서 최대 1,000여명이 참가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신변안전, 이동방법 등 협의사안이 간단치 않은 것들이다. 아시안 게임 실무협의 1주일 뒤에는 서울에서 경협추진위(26~29일)가 열려 철도 도로연결, 개성공단 건설, 임진강수해방지 등을 논의하게 된다.

이들 세 가지 사업별로 각각 여러 차례의 접촉이 이뤄져야 할 것이므로 이것만으로도 회담 일정이 빡빡해질 것 같다.

다음달에는 적십자회담(4~6일)을 시작으로 친선축구경기(6~8일), 금강산관광 활성화 회담(10~12일), 금강산 댐 공동조사 실무접촉, 이산가족 상봉, 남측 태권도 시범단 방북이 진행되고 10월에는 8차 장관급 회담(19~22일), 북측의 경제시찰단 및 태권도 시범단 방문이 예정돼 있다.

그러나 6차례의 장관급 회담과 2차례의 특사회담을 통해 상당수 의제가 지켜지지 않은 점을 상기하면, 향후 남북관계의 가늠자는 역시 실천이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이번 회담의 마지막 전체회의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을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계 훼손으로 번질 변수 산적

남북관계는 일단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4월5일 합의 단계로 복원됐지만, 서해교전에 대한 북측의 완고한 입장, 남한의 대선 정국, 북미대화 등 남북관계를 훼손할 수도 있는 변수들이 널려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임기말 레임덕 정국을 감안하면 우리 정부가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햇볕정책을 펼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남북 모두 모처럼 불어온 훈풍이 식지않도록 유리그릇을 다루듯 금도를 지켜가며 조금씩 나아가야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남북은 일단 장관급 회담과 분단이후 서울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민간행사인 8ㆍ15 민족통일행사를 무사히 치름으로써 민간ㆍ당국 관계 복원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동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2/08/2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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