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잣대로 가른 한국의 지식인

한국 지식인의 이념 지도 그린 ‘말, 권력, 지식인’

1990년대 초반 냉전은 전지구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사상과 이념의 냉전은 쉽사리 해빙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과연 당대 사회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떠 다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어디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연세대 김호기(42ㆍ사회학) 교수는 지식인의 중립성을 당연시 해 온 기존 통념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성찰의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김 교수의 사회비평집 ‘말, 권력, 지식인’(아르케 펴냄)은 학자에 대한 가치중립적 태도와 단호히 결별한다.

특히 현재 국내의 정치ㆍ사회학계를 대표하는 중견ㆍ원로 학자들을 진보ㆍ중도ㆍ보수 등의 세 가지 잣대로 구분한 명쾌함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비주류의 길을 걷는 진보주의 학자들

김 교수의 논의는 국내에 사회과학의 시대를 연 1980년대 중반의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 전쟁 이후 사실상 단절돼 온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적 전통을 이어 받은 사구체 논쟁은 당시 지식인 사회를 휩쓴 태풍이었고 이후 수많은 후손들을 배태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변혁 운동 또는 진보적 지식에의 열망에 사로잡혀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 NLPDR(민족해방민주주의 해방론) 등 암호와도 같은 사구체 변혁노선을 경쟁적으로 파 들어 갔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열풍이었다.

그 신호탄으로 책은 1980~90년대 한국의 진보주의 학계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국내 저작인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경제학)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들고 있다. 신 교수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20년을 복역하다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이후 발표됐던 책이다.

그의 인간주의는 생태주의와 민주적 공동체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민족주의를 자유주의ㆍ민주주의ㆍ평등주의 등 계몽주의 담론과 접목시킨 강만길 교수(상지대 총장) 역시 진보 계열이다.

이후의 진보주의 학자들은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외교학) 역시 진보주의 정치학자 계열로 신좌파적 국가론을 도입해 출판 활동 등으로 한국의 정치 현실을 설명하는 작업에 주력해 오고 있다.

또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했던 조희연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등 NGO들의 이론적 대부다. 이들 진보주의자 세력은 현실적 이슈에서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을 빚는 등 비주류로서의 길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 지식사회의 주류는 보수주의다. 연고주의나 위계질서가 우선시되는 유교적 이념에다 한국전쟁 등으로 분단 체제를 생생하게 체험하다 보니 한국은 자연스럽게 우익 주도의 사회로 재편됐다.

송복 전 교수(연세대 사회학)는 ‘논어’와 ‘사기’ 등 동양 고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근거로 해 보수주의를 한국 사회의 해법으로 제시하는 보수주의 논객의 대표다. 송 교수가 전통적 선비를 지향한다면 이상우(서강대 정치학) 교수는 현실적이고도 보수적인 국제 관계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함재봉(연세대 정치학) 교수는 계간지 ‘전통과 현대’를 근거지로 해 유교 사상을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와의 관련 아래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동복 (명지대) 객원교수는 언론과 공직 등 다양한 현실 참여 경력에 힘입어 통일보다는 분단 관리 작업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ㆍ보수 모두에게 쓴소리

필자는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 진보주의는 지식인의 미덕인 비판적 도덕성은 있을지언정 현실성은 결여됐다는 지적이다. 진보주의 진영은 당위성을 강조하다 보니 현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와 정보화 등 자본주의 고도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 한다는 주장이다.

또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철학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보수주의가 단순한 수구와 반동이 아니라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모색한다면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의 길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주의다. 먼저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이념에 대한 조사를 한다면 상당수는 스스로를 중도주의에 위치시킬 것이라면서 중도라는 말의 모호성에 대해 말한다. 중도주의란 좌파와 우파의 장점을 절충하는 이념일 수도, 기회주의로 매도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상진 교수(서울대 사회학)는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사회 변혁이 아닌 중산층에 의한 민주적 연대를 근간으로 하는 중민(中民)론의 주창자이다. 좌파와 우파를 모두 넘어 서야한다는 화제의 책 ‘제 3의 길’을 번역 소개한 그는 현재 대통령 자문 정책 기획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하고 있다.

또 김우창 교수(고려대 영문학)는 한국을 이성적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경고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운찬 교수(서울대 경제학)는 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케인즈 주의를 근간으로 구조조정과 재벌문제 등 경제적 현안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적 경제주의자다. 성장과 형평을 결합하되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자는 입장이다.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학)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으로 한국 정치 이론계에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중도주의 정치학자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 위원장이었던 그는 IMF 관리 체제 하의 김대중 정부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책을 제시했다.

당시 최교수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좌파와 우파로부터 동시에 비판을 받았다. 이 상황은 중도주의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좌절을 상징했다.


‘제3세대 지식인론자’ 제시

김 교수는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이념들 사이에는 건강한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제 3세대 지식인론자’다.

그는 “우리 지식 사회는 분열, 그로 인한 권력에의 예속, 공론 규율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라며 “이 책이 진보ㆍ보수ㆍ중도가 건강한 긴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받침돌로 쓰여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저자가 해당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직접 발품을 판 대가로 탄생한 노작이다.

김 교수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와의 대담 후 매천 황현과 단재 신채호의 모습이 떠올라 한참을 혼자 걸었다’고 소감을 기록하고 있다.

책은 또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났던 강만길 교수의 소탈함과 차분함은 여타 역사학 전공 교수와 달랐다’는 등 일반 사회과학 도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의 맛을 물씬 풍긴다.

저자가 보수주의자로 분류한 송복 교수의 경우, 인간적 매력의 덕으로 보수와 진보 논객 모두에게서 원만한 교류를 갖고 있다는 등 강단외적 정황에 대한 서술 역시 여타 사회과학 서적에서 볼 수 없는 내용 역시 책 특유의 맛이다.

필자는 현재 맹렬히 진행되고 있는 세계사적 변화에 얼마나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의 문제가 진보ㆍ보수ㆍ중도 등 모든 진영에 남겨진 숙제라고 지적한다.

장병욱 기자

입력시간 2002/08/31 11:48


장병욱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