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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참새를 태운 잠수함(上)

1975년 “순수하고 진실된 노래로 혼탁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경종을 울리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태동했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은 본격적인 노래 동아리였다. 그들은 “우리가락을 포크에 접목하는 창작적 음악실험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겠다”는 야심한 젊은 음악공동체였다.

1970년대는 통기타음악이 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했지만 창작 곡보다는 외국 번안 곡들이 온 나라를 뒤덮으며 넘실거렸다. “번안 곡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참신한 우리 창작포크가요를 온 나라에 울리겠다”는 꿈을 먹었던 유한그루, 곽성삼, 한돌, 전인권, 강인원, 명혜원, 정태춘, 남궁옥분, 이종만 등은 이 모임을 거쳤던 대중가수들이었다.

모임의 정신적 지주였던 함장 구자룡과 홍보와 운영전반을 책임지는 총무였던 구자형은 음악다방 DJ출신이었다. 형제였던 두 사람은 한방과 양악을 겸비했던 의사 부친 구광회와 공무원이었던 모친 한정순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1951년과 1954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곤지암에서 태어났다. 40세에 세상을 등진 부친은 젊은 시절 ‘장세정 악극단’을 쫓아다니기 위해 가출을 일삼을 만큼 끼가 넘쳤다.

민예극단 대표를 거처 의정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인 서울대 미학과 출신 큰형 구자흥은 형제들에게 항상 민족의 얼을 심어주었다. 시인 김지하의 직계였던 그는 대학 때부터 뉴월드와 세시봉에서 아르바이트로 DJ를 했다.

형제는 큰형을 통해 팝송을 듣기 시작했다. 훌쩍 무전여행을 떠나기를 좋아했던 구자룡은 큰형의 영향으로 중3 때부터 미아리 세라비 음악다방에서 DJ생활을 시작했다. 한영애가 부른 ‘제주도’는 그가 제주도 무전여행 때 지은 글에 구자형이 가락을 얹어준 형제의 합작 품이었다.

아늑하고 깨끗한 자연 속의 시골생활이 좋았던 구자형은 정릉 숭덕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부친의 사망이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담임선생이 시험지를 뺏어버리자 학교 대신 뒷산에 올라가 담배피고 노는 선배들과 어울렸다.

삼선중학을 다니던 15살 때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형이 동회마당에서 통기타로 ‘벤쳐스’곡들을 연주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타를 장만하기 위해 공장에 다녔다. 월급을 받아 기타를 사고 수업료를 내기 위해 신문배달을 해 동네친구들 3명과 3개월 간 기타를 배웠다.

중학교 졸업 후 5년 제 홍익공전 도안과에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이 따분해 3개월만에 그만두었다. 구자형은 음악이 듣고 싶어 DJ를 하는 형 구자룡에게 부탁을 해 미아리 길다방 DJ과 고대 앞 ‘자메이카’의 보조DJ로 일하며 음악 갈증을 풀었다.

구자형은 1973년 큰형소개로 이백천이 운영하는 명동의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로 진출하고 구자룡은 박원웅이 만든 DJ협회에서 협회보 편집장을 했다.

그러나 1974년 봄 여성전용 ‘샤넬 다방’에서 대마초 피는 여성들이 르시랑스로 도망을 와 르시랑스도 퇴폐업소로 몰려 문을 닫자 청평 안전유원지에서 여름 한철 일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평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내려온 오세은, 윤연선, 최은옥 등의 노래를 듣자 창작욕이 꿈틀거렸다.

청평의 무심한 강물에 비친 달빛을 보며 첫 곡을 작곡했다. 이후 명동의 호프집 ‘썸씽’에서 일을 하면서 창작의 봇물이 터졌다. 그의 노래를 들은 이백천은 “사람에게 하는 노래가 아니라 하늘에다가 이야기하는 넋두리 같다”고 평했다. 구자형은 “팝송보다는 창작을 해야 된다”는 그의 조언을 가슴에 담았다.

이때 소문을 들은 명동 로얄 룸싸롱 지배인 김태일이 찾아와 “공연비 일체를 제공하겠다”며 청계천 유화호텔에 연습할 방을 선뜻 잡아 주었다. 형 구자룡은 “구자형 작곡발표회보다는 뜻 있는 공연타이틀이 있어야 한다”며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잠수함은 한국의 사회를 상징하고 그 사회가 순수와 진실이라는 산소가 희박해지면 노래로써 정화하고 경종을 울리라는 뜻이라며 참새는 진실(眞)을 노래하는 힘없는 서민을 말한다”는 설명에 구자형은 인생의 횃불을 찾은 듯 감동했다.

구자형은 기타와 보컬을 맡고 12짝 드럼과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미군대령 아들과 베이스를 치는 중학친구 안세열과 함께 3인조 포크록그룹 ‘잠수함’을 결성했다.

1975년 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창작 곡으로 꾸며진 참새와 잠수함의 첫 공연이 개최됐다.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7개월 후 서유석, 윤연선, 하남석, 김상배, 강태웅, 황의준 등 유명가수들이 초청되어 2회 공연이 개최되었다. 함장 구자룡은 “이런 정신을 가진 공연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며 동숭동 성베다교회 교육관에서 김니니안 신부의 도움으로 매주 토요일 정기적인 참새와 잠수함공연을 시작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9/0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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