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고도를 기다리는 일본경제

‘고도’는 사물엘 베케트의 유명한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로 기다려도 오지 않는 가공의 존재이다. 일본경제가 앞으로 1980년대의 성장세 회복을 기다리는 것은 베케트 작품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벌써 12년을 넘긴 일본경제의 침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정치지도력 공백 때문에 조만간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경제의 침체국면이 끝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 번째는 소비, 투자가 부진하고 이에 따라 물가 하락이 되풀이되는 소위 디플레이션 악순환의 종식이다.

두 번째는 기업과 은행부실의 획기적인 청산을 통한 소위 ‘발란스시트(Balance Sheetㆍ대차대조표) 훼손’의 극복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지만 무엇을 강조하는가 하는 차이가 있다. 첫 번째 견해가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떤 식으로든 물가하락추세를 역전시킬 만큼 총유동성이 늘게 되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 경제가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할 것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반면 두 번째 견해는 좀 더 비관적이라 하겠다. 즉, 일본은 그 동안 재정지출증대와 제로금리 정책을 통해 경기부양을 여러 차례 도모했지만 아직까지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을 지적하며 점점 커지고 있는 부실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거시진작정책이 효험이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경제의 회복에 어느 방안이 선택되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연 어떤 방안이던 상관없이 이들 처방이 채택되겠는가에 달려있다. 두 가지 방안 모두 고육지책이며 상당히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수반한다.

먼저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키는 방안은 총수요진작과 기존 부실채권의 실질부담을 낮추는 것이 기대되는 효과이다. 하지만 이런 효과는 국민전체에 인플레이션 세금을 부과하여 부실채권을 상계 하자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부실채권을 유발한 기업과 금융권의 부담을 덜어주는 반면 채권이나 예금 등과 같은 명목자산 보유자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음으로 부실채권정리를 통한 발란스시트 훼손 보전방안 역시 문제가 많다.

즉,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여해야 하는데 이런 재원의 조달은 정부부채증대, 세수증대, 통화증발 등을 통해서 가능하다. 신용등급의 지속적 하락에서 볼 수 있듯이 재정이 이미 크게 악화되어 추가적인 정부기채가 점점 어려운 상태이고 장기침체의 여파로 세수증대 또한 여의치 않다. 통화증발은 전기한 인플레이션 유발과 동일한 문제를 유발한다.

결국 현재 침체국면을 타파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정책선택이 모두 대다수 국민에게 부담을 증대시키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방안을 채택하는가는 관료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이 내려야 할 결정이다.

하지만 이익집단의 구속을 탈피하지 못하여 1990년 불황 장기화에 크게 기여 해온 정치권이 이렇게 심각한 정치적인 비용을 수반하는 정책선택결정을 내리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 동안 진행된 정책을 살펴보면 이런 결론이 명확해진다.

금융구조조정 소요자금을 조성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상대적으로 경기부양목적의 예산증액은 여러 차례에 걸쳐 쉽게 이루어져왔다. 즉 공공사업확장으로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예산증액에는 쉽게 임하면서 과거의 잘못이 부각되고 이익집단이 반발 할 소지가 있는 금융권 부실처리를 위한 공적자금사용에는 아직까지도 미온적이다.

정치가들의 이런 행태는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나 일본의 독특한 상황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 같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민당의 실질적 정권 독점체제가 지속되어 경제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야당이 없었다.

자연히 선거가 정책선택과는 거리가 멀었고 계속 집권한 자민당은 사실상 독자적인 정책안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으며 정책수립과 집행은 관료들에게 위임됐다. 이런 의사결정체계가 무리 없이 운영되었으나 1990년 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자 그 한계가 노정된다.

더더욱 지난 10년 동안 각종 정당이 이산집합 하면서 그나마 정치권의 축이 붕괴되어 지도력공백이 불황장기화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경제가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제 성장이 지난 10여 년 수준이상으로 나아질 가능성이 낮다. 우리와 닮은꼴인 일본의 상황을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센터소장)

입력시간 2002/09/0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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