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현불패' 신화를 쓴다

메이저리그 초특급 마무리 김병현, 성공신화 향한 쾌속항진

8월말 까지 32세이브를 올리며 메이저리그 마무리투수 랭킹 1, 2위를 다투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김병현(23)이 최근 새로운 별명을 한가지 얻었다.

‘미스터리 맨’(Mystery man). ‘의문의 사나이’라는 뜻이다. 애리조나를 담당하고 있는 미국 기자가 8월 한달 동안 등판할 때마다 안타를 맞고 위기에 몰리면서도 실점은 단 한점 밖에 내주지 않고 세이브를 차곡차곡 거두고 있는 것을 보고 붙여준 닉네임이다.


미스터리 맨의 32세이브 행진

정통파 야구만을 고집하는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김병현은 의문 투성이일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땅에 스칠 듯 팔을 내려 던지는 투구 폼 ▦떠오르는 커브와 플리스비(플라스틱 원반형 장난감) 슬라이더 등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 끝의 변화가 심한 구질 ▦마운드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투구 폼 ▦조그마한 체구(178cm 82kg)에서 이상한 폼으로 던지지만 153㎞(95마일)까지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 등등…

수십년간 정통 메이저리그 경기만을 본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의 ‘이단아’인 셈이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들이 김병현이 오늘의 성공 신화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며 김병현의 생존 전략이다. 여기에는 김병현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실험정신도 포함돼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투구 폼을 정통파 투수에서 잠수함 투수로 바꾼 것도 컨트롤이 엉망이었던 것을 잡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런 김병현의 노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계속됐다. 듣도 보도 못한 떠오르는 커브(커브는 모름지기 타자 앞에서 떨어지게 되어 있다)와 타자 앞에서 많게는 45도 이상 꺾이는 슬라이더는 김병현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후 모습을 드러낸 구질이다.

투구 폼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한가지 투구 폼으로 던진다. 하지만 김병현은 마운드에서 서너 가지 피칭 폼으로 타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LA 다저스의 에이스인 케빈 브라운처럼 어떤 때는 몸을 뒤로 꼬았다가 던지기도 한다.

투구 직전 글러브를 얼굴 앞에 고정시켰다가 피칭에 들어가는 것은 팀의 에이스인 랜디 존슨을 보고 배웠다.

올 시즌 투구 후 오른 발을 왼쪽으로 강하게 차는 것(미국에서는 태권도가 아니라 카라테 킥으로 불린다)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보스턴 레드삭스)의 폼을 본 딴 것이다. 이런 투구 폼들은 김병현이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빅리그 최고의 투수들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김병현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지난 해 월드시리즈의 절망에서 올시즌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사실 지난 해 월드시리즈 4, 5차전에서 이틀 연속 9회말 2사후 동점 투런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던 김병현의 재기 여부는 그야말로 물음표였다. 비슷한 비극을 겪은 후 불행한 가정사까지 겹쳐 끝내는 자살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미치 윌리엄스 등도 월드시리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들은 메이저리그에서 산전수전 다겪은 베테랑이었지만 김병현은 고작 22살 ‘루키’였다. 정신적인 충격이 노장들 보다 더 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올 시즌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열린 애리조나의 스프링 캠프 때는 심리학자 등이 김병현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해서 몰래 연구하기도 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마이웨이’

이렇게 나름대로 적자생존의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김병현에 대해서 코칭스태프는 “안타를 맞은 후에도 마운드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라”고 주문하는 등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보브 브렌리 감독이나 척 니핀 투수코치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투구 폼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김병현은 서너가지 폼을 갖고 상황에 따라 바꿔가며 던지는데 이것을 한가지로 통일하라는 것이 코칭 스태프의 요구 사항이다.

그러나 김병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동안 걸어왔던 것 처럼 ‘나의 길’을 갈 것이다고 맞서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지난 해 보다 더욱 더 좋아 코칭스태프로서도 어쩔 수 없다.

올 시즌 김병현의 기록 행진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비록 팀 창단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김병현은 ▦팀 역사상 최다 세이브(45개ㆍ지난 5월17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전) ▦한시즌 개인 최다 세이브(31개ㆍ8월23일 신시내티 레즈전)▦역대 내셔널리그 최연소 50세이브(6월9일 보스턴 레드삭스전) 등등 각종 기록을 세웠다.

지난 해 월드시리즈에서 절망했던 선수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올 시즌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지금 김병현이 던지는 공한개 한 개마다 애리조나 팀 마무리 투수의 역사가 새로 쓰여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김병현은 올 시즌 화려한 성공신화의 종착역을 향해 다시 한번 쾌속항진에 들어갔다.

월드시리즈 2연패. 예정되었던 파업도 노ㆍ사양측의 타협으로 인해 해결됨에 따라 제일 큰 ‘걸림돌’도 사라졌다. 현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강팀으로 불리고 있는 애리조나로서는 커트 실링과 랜디 존슨 등 두 명의 골리앗 투수가 건재해 있기 때문에 2연패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면 김병현은 1년만에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다. 올 해는 동정과 안타까움의 시선이 아니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애리조나 투산=이석희 일간스포츠 야구부 기자

입력시간 2002/09/0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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