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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남북종단비행에 도전하는 오세훈

"인생 걸 가치있는 아름다운 비행"

"오직 조국의 하늘을 날고 싶을 뿐입니다."

2시간 30분 위해 12년을 기다렷다. D-dau 한달여전. 오세훈(54.한국항공스포츠협회 회장)씨의 초침은 더디고 더디다. 초경량비행기 장거리 비행 세계기록보유자. 행그라이딩, 페러글라이딩에도 노련한 20여년 경력의 베테랑 항공인.

그러나 그 어떤 과거의 기록과도 상관없이, 그는 자신의 꿈꿔온 일생 최고의 도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오는 10월 3일에 펼쳐질 남북종단비행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이른는 총거리 240km 예상 소요시간 총 2시간30분의 비행. 그에게는 필생의 숙원이다.

참으로 감질나는 기다림이었다. 어렵게 남북한의 승인을 받아내고도 서해교전 사태 등 돌발적인 정치상황 때문에 번번이 날개를 접곤 했다. 얼마전 또 다시 서해교전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오씨는 누구보다 마음 졸였다. 철책없는 하늘 위로도 분단의 벽은 높았다.

왜 이렇게까지 그는 남북종단비행에 애착을 보이는가? 그는 전쟁의 기억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사는, 어쩌면 영원한 병사다. 약 35년전 유격대원으로 참전한 월남전의 참혹한 기억을 아직도 가슴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오씨는 당시 파병된 한국유격요원중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3인중 한 사람이었다.

"자유를 위해 죽여야했고, 죽어야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싸우고 죽는 그 끔찍한 전쟁처 한가운데에서 왜 내가 이래야 하나, 무엇이 이런 사황을 불러온 것인가, 전쟁과 대립에 대해 회의가 들었습니다. 조국의 분단은 더 이상 안됩니다. 우리의 남북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하루 빨리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저는 조국의 하늘을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보고 싶습니다. "

군입대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편안했다. 부유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개인 가정교사를 둘 만큼 넉넉한 생활을 누렸다. 5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타고난 운동체질에다 날마다 말썽이 끊이지 않는, 극성맞은 개구쟁이였다.

중·고교 시절에는 기계체조선수로도 활동했다. 어릴적 '말썽' 전력 중에서도 유난히 항공기와 얽힌 일들이 많다. 1970년대에는 직접 헬리콥터를 만들겠다며 친구들 서넛과 작당해 대형 오토바이 엔진에다 간이의자, 당시로서는 값비싼 알루미늄 판까지 사들여 뚝딱거리다가 애꿎은 친구집 옥상의 장독대만 모두 박살낸 적이 있다.

1968년 군입대는 그의 삶에 일대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입대 3개월만에 월남전 참전을 자원,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도깨비연대' 특수요원 훈련소로 배속되면서 그의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함께 바둑을 뒀던 전우가 잠시 뒤 토막시체로 살해당한채 발견됐습니다. 독살당한 한 전우는 독으로 인한 가스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우리가 마니자마자 몸이 폭발하듯 터져버렸습니다. 쓰러진 전우를 앞에 두고도 즉각 후퇴명령 때문에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데도 구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적진에 두고 떠나는 그 심정은 아무도 이해를 못할 겁니다. 36개월을 다 채우도록 매일 그런 지옥을 견뎌야 했습니다."

14개월만에 첫 휴가를 받아 집을 찾았을때, 무섭게 달라진 그를 보고 가족들이 대성통곡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무심코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자 오씨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깐채 순간적으로 섬찟한 곁눈질로 소리나는 쪽을 살폈다.

살벌한 전장에서 얻어온 자동반응이었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을 완전히 극복하기까지, 군복으 벗고도 5년이나 더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군의 비인간성이 조종 배운 계기

항공인이 된 것도 그에게는 취미가 아니라 월남전에서의 한(恨) 때문이었다. 참전 중 그는 뼈저린 애국을 배웠다. 당시 헬리콥터로 한국 유격요원들을 태워적진 중심부에 투입시켰던 미군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빨리 벗어날 생각뿐, 한국군의 생사나 안전은 관심 밖이었다.

요원들이 적당한 착지지점을 찾기도 전에 미군들이 마구 발길로 걷어차며 떨어뜨리는 바람에 고공투하 과정에서 이미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한국군이 적지 않았다.

"그때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모릅니다. 미군에게조차 우리는 완전히 파리목숨이었습니다. 우리에게한 짓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나중에 꼭 복수하겠다, 나도 너희처럼 비행기 주인이 되어서 절대 우리가 남의손에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게 하겠다고요. 그 때문에 초경량 비행기를 가까이 하기 시작해 1980년대에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 전문 조종훈련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첫 솔로비행을 했을 때는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미국이든, 일본이든, 러시아든, 내 조국만 건드리면 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본업은 사업. 그는 1990년대까지도 덕산온천과 성남 등지에서 관광호텔업체를 경영해온 사업가였다. 그러면서도 초경량비행기를 비롯한 항공스포츠분야에서 맹활약을 벌이며 숱한 도전과 성공기록을 남겼왔다. 1994년 6월2일 중국 산동성 영성시에서 충남 몽사포를 잇는 672km 구가느 8시간 35분의 한중해협 횡단비행성공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게 한 대표적인 타이틀이 되었다.

이 기록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리펑 총리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았고 비행출발지였던 영성시 현지에 오씨의 역사적 비행을 아로새긴 기념비까지 세워지는 영예까지 안았다.

그외에도 국내의 독도망언 규탄 독도비행, 통일기원 인간띠 잇기행사 등 통일과 관련된 행사들이면 거의 빠짐없이 오씨가 함께 있었다.

이만큼 건재한 것도 기적같은 일이다. 지난 20여년간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1994년 모두가 위험하다며 말리는 한중해협 횡단에 나설때는 출발 전 새벽, 막내딸 앞으로 유서까지 남겼다. '(내가 죽더라도) 놀라지 말아라. 아바는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비행도중 세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돌풍과 산소부족, 극심한 추위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몇번이나 반복, 도중에 한중 전투기들이 긴급출동해 수색작전을 벌이는 소동도 벌어졌다. 어느해 어린이날 행사장에서는 기장의 악조건으로 추락사고를 당했다.

어린이들의 대형참사를 피하기 위해 급히 기수를 돌려 옆 건물에 충돌시키면서 오씨는 목뼈가 부러지는 대부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곧이어 예정된 히말라야 정상 도전 약속을 어기기 싫어 도망치듯 네팔로 직행했다가 그의 심각한 상태를 본 현지의 북한대사관 지인들이 건넨 알약을 먹은 뒤 몇 달 후 병원검사에서 '거짓말처럼 뼈가 다 붙어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1996년 광복절에 열린 남북합수합토식 기념 비행 때에는 발이 세부분으로 절단되는 사고도 있었다. 엄청난 통증 속에서도 응급처치만 마친 채 부상사실을 숨기고 지방 행사장까지 강행군했다가 결국 운동장을 돌던 중 쓰러지고 말았다.

통일꾼으로 나선 것은 1982년 외국 비행훈련을 마친 뒤 잠시 귀국한 사이 우연히 TV로 보게 된 남북이산가족찾기 생중계 영향이었다. 방송이 있던 내내 그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함깨 울었다.

며칠간의 방송이 끝난 뒤 오씨는 전에도 하지않던 술, 담배에 까지 빠진채 자신의 손으로라도 통일 을 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맡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배역은 남북종단비행이었다. 1990년 당시 통일원에 정식으로 남북종단비행계획서와 북한주민접촉 승인신청서를 제출했다. 뜻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통일원을 드나든 한편, 프랑스, 독일 등 외국의 현지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당국 관계자들을 만나 호소하는 등, 고집스러운 설득과 기다림 끝에 마침내 1991년 통일부와 국방부로부터 남북통일비행 실무협의 승인 및 방북허가가 내련진데 이어 북한쪽에서는 1999년 통일비행을 위한 초청장을 발급받기에 이르렀다.


1996년 성사 직전 김 주석 사망으로 좌초

1996년에는 성사 직전에 좌초되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이 준비되면서 그 기념행사에 오씨의 비행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넫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의 사망소식으로 모든 것이 백지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이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오씨가 훗날을 위해 북한대사관을 통해 조화를 보낸 일이 알려지면서 안기부에 긴급체포돼 몇 달간 말 못할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도 해마다 한두번씩은 연례행사처럼 이어진 연행과 구속, 끊임없는 감시 등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오씨는 지금도 '집안을 망친' 죄인처럼 문중의 시제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꿈은 다시 펼쳐졌지만, 그간 통일운동과 남북종단비행준비에 재산을 모두 쏟아붓다시피 한 그에게는 지금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넉달 전인 지난 5월 9일에는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다.

3년전 북한에 자전거 1,000대를 보내는 과정에서 부득이 집을 잠시 담보로 잡혔다가 일이 꼬이면서 결국 경매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현재 아버시 오씨는 한국항공스포츠협회 사무실에서, 아들과 딸은 외삼촌댁 등에서 각각 나뉘어 보내진 채 지내는 등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이젠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다만 지금껏 별고생없이 살아온 가족들에게까지 갑자기 이런 고생을 시키는 게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플 뿐입니다. 그래도 주위에서 격려와 위로를 보내주는 분들이 많아 큰 힘이 됩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제게는 재산입니다. "

그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초경량비행기는 모두 3대. 그간 거쳐간 것까지 합치면 10대쯤된다. 그런데 정작 이번 남북종단에 쓸 비행기가 없다.

12년간 계획이 미뤄지고 미뤄지는 사이, 비행기가 먼저 지치고 탈진해버렸다. 낡은 비행기 대신 '평화의 새'라 미리 이름 붙여둔 새 비행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6년전 중국정부의 제의로 시작했던 중국내 항공스포츠관련 사업체 '투데이스포츠타운'까지 파려고 내놓은 상태다.

그는 다시 프랑스의 비행훈련지로 돌아간다. 그는 지금껏 한달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왔다. 고공훈련을 위해서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그는 오늘까지 11년째 기약없는 비행훈련을 반복해왔다.

이번에는 틀림없을까? 그렇기만 하다면 종단비행후 16일 뒤에 있을 한중수교 10주년 기념 만리장성 횡단 비행도 오씨에게는 홀가분할 것이다.10여개국 50여대의 경비행기가 참여하는 이 행사에서 오씨는 리더를 맡았다. 보름간 부조종사 임초희(18.서경대1년)양과 함께 중국 산해관에서 우루무치까지 3,334km 의 대장정을 벌인다.

그는 지금도 몸이 온전치 않다. 6년전 비행중 다친 발이 재발, 몇 달 전부터 다시 마비와 찾아와 혈관을 뚫어주는 약을 복용중이다. 이래서 그의 마음은 더욱 절박하다.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전쟁 체험세대가 완전히 퇴장하기 전에 그는 조국의 하늘을 힘껏 날고 싶다. 서울, 판문점, 사리원, 평양을 잇는 하늘길 .

2시간 30분의 기적을 기다리는 오씨의 인생 최고의 날이 소리없이, 그러나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입력시간 2002/09/1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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