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같은 어른 키덜트族 24시

21세기 문화현상으로 부상한 새로운 키워드

어린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Kidult)는 21세기 문화현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로 통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시절의 감성과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새로운 문화계층인 동시에 강력한 소비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바비인형의 옷을 사기 위해 인형전문점에서 쇼핑하고 여가시간에는 애니메이션영화를 즐긴다. 새로 마련한 자동차 내부는 온통 마시마 캐릭터로 꾸몄다. 특별한 날이면 취미로 조립해둔 프라모델을 주위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초등학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4살된 딸과 두돌배기 아들을 둔 30대 부부인 이민규, 김영자씨가 바로 이들이다. 부인 김씨는 일본애니메이션을 원어로 감상하기 위해 학원까지 등록했고 건축가인 이씨 역시 시간날 때마다 조립해둔 프라모델(조립완구제품)이 수십 개가 넘는다.

딸 유진이도 바비인형의 매력에 쏙 빠져 엄마와 함께 돌피인형(구체관절 인형으로 사람과 흡사하게 생김)을 수집하기 시작한지 벌써 오래다. 주위의 반응은 어떠냐는 물음에 이들은 단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계속 좋아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이 시대 새로운 문화주체로 떠오른 키덜트.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곰돌이 모양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커플티를 입거나 갖가지 캐릭터의 열쇠고리를 가지고 다니고 새로 개봉한 애니메이션을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들이라면 바로 키덜트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키덜트족 전성시대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대표적인 키덜트 문학이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 주부와 직장인에 이르는 어른들까지 이 꼬마 마법사의 신비한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러한 관심은 관련상품으로 이어져 키덜트문화 신드롬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또한 온라인에는 수많은 키덜트들의 분신인 사이버 아바타들이 이미 폭넓게 퍼져 있으며 시내 중심가를 비롯한 대학가에는 캐릭터 액세서리를 휴대하거나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풍의 패션을 선보이는 키덜트족들로 넘쳐나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대현동의 ‘아니메 스튜디오’는 수백 가지에 이르는 프라모델과 캐릭터상품, 만화책, 코스프레(캐릭터분장) 용품을 판매하는 전문캐릭터 상점이다. 당초 10대를 대상으로 오픈한 곳이지만 이곳을 찾는 고객들의 40%이상이 20~30대의 젊은 성인층이다.

스튜디오의 차연실(28)디자이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상품을 구입하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샵을 꾸준히 방문하는 매니아들의 수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삼성동 코엑스몰 내의 ‘아카데미’는 주변에 회사가 많은 위치특성상 40대 중년층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매장에서 만난 회사원 고정철(42)씨는 취미가 ‘프라모델 조립’이라며 가끔 주위의 친지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대앞 ‘바비오픈카페’나 사이버상의 수많은 관련동호회도 이들 키덜트족의 주요 활동영역으로 통한다. 영화속 인물들의 의상이나 분장을 똑같이 흉내내는 코스츔플레이 등도 기존의 고정된 사고를 거부하는 키덜트들의 새로운 관심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현대는 키덜트족의 전성시대다.


키덜트족을 잡아라

이러한 키덜트족이 새로운 소비주체로 등장하면서 이들을 가장 빠르게 흡수하고 나선 것이 바로 광고와 패션계를 비롯한 문화시장 전반이다.

구매력이 없는 아동층이나 단순히 즐기는 것에만 익숙한 고연령층에 비해 막강한 소비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키덜트족은 각 기업들의 마케팅 타깃 1순위로 급부상했다. 이들은 키덜트족의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감성에 호소하며 새로운 제품들을 발빠르게 내놓고 있다.

TV에는 그 옛날 동화책의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각종 패러디 광고가 늘어나고 한때는 어른인지 아이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드라마가 연일 상한가로 치솟았다. 스크린 분야에서도 이미 스타워즈나 심슨가족을 모체로 슈렉과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등 여러 편의 키덜트 영화가 제작됐다.

키덜트 열풍은 패션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곰을 소재로 한 이랜드계열의 티니위니는 1년 간 3배 이상의 매출증가를 보였으며 아동복 전문브랜드 폴로보이스걸스와 휠라키즈 등을 중심으로 보디컨셔스(아동복중 큰 사이즈를 성인이 입는 것)라 불리는 새로운 패션 스타일이 각광받고 있다.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걸리쉬브랜드 바닐라B와 올리브데올리브, 로질리 등도 키덜트족의 구매욕구를 맞춘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백화점 식기매장에 만화주인공 그림이 그려진 접시 세트가 인기품목으로 자리잡고 어린 시절 먹던 과자와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 판매 사이트가 히트를 친 것도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키덜트들의 문화 신드롬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린이와 성인의 경계에 있는 키덜트족이 동시에 두 문화를 취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이상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과 더불어 꾸준히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떠오르는 문화주체 키덜트

전문가들은 키덜트족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무엇보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꽉 짜여진 일상을 거부하고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성인들의 일탈심리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생존경쟁과 사회에 대한 각박함에 식상해 맑고 순수했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이와 관련 아주대 사회학과 김병관 교수는“드러내놓고 즐기는 문화’와의 합일도 무시할 수 없는 키덜트족의 등장배경”이라고 덧붙인다. 또한 남들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의견과 행동이 중심을 이루는 시대적 분위기도 키덜트문화가 떠오르는데 한몫을 한다고 설명했다.

키덜트족. 그들은 어린이도 어른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아이의 순수함과 성인의 이성을 동시에 지닌 우리세대의 새로운 문화주체다.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빛깔은 당당함과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한 시원한 원색을 가진 키덜트만의 컬러다.


“키덜트요? 그냥 Kid 라고 불러주세요”

서울 삼성동의 한 캐릭터 상점에서 유난히 토토로(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온몸에 털이 가득한 요정)에 관심을 보이는 고병일(25.대학생)씨를 만났다. 고씨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토토로 라며 그밖에 다른 상품들을 함께 구경하기 위해 청주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상품들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변함 없이 고씨의 친구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각종 영화 CD를 보유하고 있고 인터넷동호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키덜트라기 보다는 외모만 성인인 키드에 가깝다.

주위의 친구들은 어떠냐는 물음에는 “오히려 모르면 ‘왕따’ 당할 정도”라고 답했다. 인터넷에 플래시를 이용한 엽기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해외 애니메이션이 활발하게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자연스레 모아졌다는 것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키덜트문화에도 밝은 고씨는 고유의 인기캐릭터 개발에 부진한 한국의 소극적 문화투자에 대해 꼬집었다. 또한 이미 깊숙이 침투해있는 외국 캐릭터 등에 국내에서 야심에 차게 내놓은 상품들이 밀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물론 저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한국 고유의 상품들이 개발된다면 언제든지 국내브랜드 매니아로 돌아와야죠. 세계시장에서의 한국 캐릭터의 선전을 기대합니다”


글 강윤화 사진 오세진

입력시간 2002/09/1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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