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뉴스포탈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서울경제
KoreaTimes
주간한국  
www.hankooki.com  


 
주간한국 홈
구독신청
독자 한마디
편집실에서

 


   벤처 밸리 24시
   비만클리닉
   김동식문화읽기
   사이언스카페
   인터넷 세상
   한의학
   땅이름과 역사

맛이 있는 집 그림펀치 라디오 세상 스타 데이트 신나는 세계여행

[추억의 LP여행] 참새를 태운 잠수함(下)

노래동아리의 큰 흐름을 이끈 음악실험

초기 멤버는 구자룡, 구자형, 강인원과 여고생 김이화, 교회 야학선생이던 이화여대 작곡과생 문성희, 작곡가 김다위 등이었다. 준비가 충분 하지 못해 교회 청소부 아저씨를 유일한 관객으로 데려와 강행한 첫 정기공연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썰렁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진행된 환상적인 분위기에 멤버 모두는 전율을 느꼈다. 이때부터 ‘참새를 태운 잠수함’공연은 촛불을 켜고 진행되었다. 지독한 고음의 여고생 남궁옥분과 대학생 교회 야학선생들이 참여하면서 제법 모임이 알려졌다.

소문을 들은 해바라기의 이주호가 찾아와 밥 딜런 곡을 멋지게 불렀지만 순수 창작 곡을 지향하는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1977년 1년간의 동숭동 시대를 접고 명동 카톨릭 여학생회관으로 무대를 옮겼다.

멤버들은 광화문에 밀집한 방송국과 신문사를 돌며 등사한 정기공연의 자료를 돌리며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폈다.

동아일보가 매주 단신으로 다뤄주고 MBC ‘임국희의 음악살롱’이 공연안내 방송을 해주면서 회원수가 150여명으로 급격히 늘어나 연령별 계층별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1함대는 DJ 등 음악관계자들로 구성된 자문위원단, 2함대는 직장인, 3함대는 대학생, 4함대는 중ㆍ고등학생들로 구성됐다.

회비만으로 공연개최가 가능해지자 구자룡을 함장에, 구자형을 총무에 각각 임명하고 함대마다 서기를 두는 공식적인 조직개편을 했다. 1977년 총무 구자형은 실력 있는 멤버를 충원하기 위해 서울시내 모든 대학을 돌며 노래꾼을 유치했다.

그 결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서울대 노래 동아리 ‘메아리’에서 박용범과 한동헌, 홍익대 엄기명, 이화여대 방송반의 안혜경이 합류했다.

동생 구자명의 소개로 1980년대 3대 언더 포크가수 곽성삼과 보성고 밴드부 출신의 이종만도 왔다. DJ최성원이 중앙대 무용과생 유한그루를 데리고 왔고 작곡가 최성호도 합류했다. 정태춘도 한두 번 참여했고 한돌도 들어와 열심히 활동했다.

작사가 최종욱과 명혜원은 언론을 보고 찾아왔다. 또한 권영임과 무명의 이홍렬, 고교생 유성찬도 재치 있는 사회와 개그로 인기를 모았다. 강인원, 전인권은 공연 2, 3시간 전에 청자다방 등 명동입구에 손수 그린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박동진이 판소리를 들려주고 DJ 김광한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공연내용이 풍성해지자 학생, 직장인 관객들로 객석은 메워졌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간 절정기를 구가했다.

서라벌 레코드에서 음반제작 제의가 들어오자 구자형은 “음반을 내도 이 노래들은 카톨릭 여학생회관에서만 들어야지 방송을 타면 우리는 해체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했지만 이미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난 멤버들은 프로가수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

남궁옥분은 라이브클럽으로 이미 빠져나갔고 전인권과 강인원도 독집과 그룹 ‘따로 또 같이’를 결성해 탈퇴했다. 한돌도 음반녹음에 불참한 채 독집을 따로 발표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곽성삼이 중심이 되어 유한그루, 안혜경, 엄기명과 서울여고생 김정은이 참여하여 총 9곡이 수록된 ‘참새를 태운 참수함-서라벌SR0145,79년’이 어렵게 세상 빛을 보았다.

이후 곽성삼과 유한그루도 공전의 히트곡 ‘물레’를 발표하며 독립했다. 구자형은 헌책방에서 ‘Hootenanny’라는 미국 언더 포크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이 책에서 “포크 정신은 스타 가수와 청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역사와 이야기를 함께 노래하는 것이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민요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모임에 전파했지만 회원들의 이탈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함장 구자룡도 모임을 탈퇴, 머리를 깎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구자형은 “모임의 정신을 지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음반은 회원들의 음악욕심을 부채질해 해체의 길을 걷게 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음악실험은 80, 90년대의 ‘소리패’와 ‘햇빛촌’, ‘종이연’, ‘푸른섬’ 등 수많은 노래동아리의 탄생에 든든한 뿌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든 노래 동아리들이 음반발표 후 해체의 수순을 밟는 악습은 우리 가요계가 극복해야 될 음악적 한계가 됐다.방황하던 구자형은 김도향의 음반제작을 돕다가 현대 악보출판사의 팝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

그 인연으로 1982년 방송작가로 데뷔해 20여 년간 활약하고 있다. 1990년에는 뒤늦게 독집을 발표하고 음반출시기념으로 1991년 신현대와 종이연과 함께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1997년에는 일본진출을 꿈꾸며 그룹 ‘구자형과 네덜란드’를 결성해 2집을 발표했다. 현재 ‘빛 기둥’ 음반사를 운영하는 그는 순수했던 노래정신이 부활하는 단꿈을 결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9/16 10:22



 

◀ 이전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