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맛과 향, 풍류와 건강을 담은 '약주'

‘술 맛도 신토불이다.’

객지에 떨어져 지내던 일가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명절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다. 한가위에는 역시 우리의 입맛과 체질에 맞는 전통주가 제격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한 지방 또는 일가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우리 토속주는 서양의 어떤 위스키도 흉내낼 수 없는 풍류가 담겨 있다.

선조들은 ‘백약(百藥)의 으뜸’이라고 했을 만큼 술을 즐겼다. 이러한 전통주는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어 선물로도 가치가 높다. 도수가 10도를 겨우 넘는 저알콜 약주에서부터 40도 이상 증류주까지 저마다 특유의 향기와 맛을 자랑한다.


지방마다 독특한 전통의 맛

서울 문배주는 알코올 함량이 40%나 되는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입안에서 전혀 거부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많이 마셔도 숙취가 없다. 일체의 첨가물이 없이 오직 물과 누룩, 조와 수수로만 빚어진 순곡 증류주이다. 영구보존이 가능하며, 오래 될수록 술 맛이 더욱 좋아진다.

토종찹쌀과 밀, 쑥, 황색국화 등으로 빚은 김천 과하주는 혈액순환과 신경통에 좋다. 여름에 장기 보존하여 마시기 위해 약주에 소주를 넣어 빚은 술로서 대표적인 혼성주이다.

공주 계룡백일주는 신선주라고도 불린다. 조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연평 이충정공이 인조대왕으로부터 제조비법을 하사 받아 궁중에 진상하면서부터 연안 이씨 종부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찹쌀, 백미, 누룩, 솔잎, 홍화, 오미자, 진달래꽃, 재래종 국화꽃을 재료로 빚어 증류시킨 다음 벌꿀을 넣어 만든 40도 술이다. 식욕 증진, 혈액순환 촉진 등의 효과가 있다.

전주 이강주는 전통 소주에 배와 생강 등을 넣어 빚었다. 현재 전북 전주에서 인간문화재 조정형씨가 6대째 가업을 이어받아 제조하고 있다. 혈압을 낮추고 머리를 맑게 하는 한약재인 울금이 들어가 알코올 도수는 25도지만 많이 마셔도 부드럽게 취한다. 미황색을 띠며 입안에 강한 향기를 남긴다.

선운산 복분자주는 야생산딸기를 주원료로 독특한 향이 특징이다. 복분자를 20일 정도 발효시킨 다음, 6개월간 숙성시킨 과실주이다. 복분자란 기묘한 이름이 붙은 유래 또한 재미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산중에서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발견하여 한껏 따먹었더니 젊었을 때의 정력이 되살아 나고 소변에 힘이 있어 변기인 항아리가 넘어져 버렸다 해서 지어졌다. 여름엔 더위를 잊게 하고 겨울에는 한기를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

금산 인삼주는 쌀과 인삼을 녹여낸 발효주로, 인삼에 소주를 부어 우려낸 일반 인삼주와는 구별된다. 약주는 황금빛깔을 내고, 증류주는 맑고 투명하다. 금산인삼주는 전통식품 명인 2호인 김창수씨가 빚어낸 술로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를 배출한 김녕 김씨 집안의 술이었다. 허약체질 개선과 혈액순환에 좋다.

안동소주는 멥쌀과 누룩으로 빚은 순곡주로 은은한 향기와 감칠맛이 일품이다. 도수는 45도로 전통주 가운데 가장 높다. 경북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비법으로 전해 내려오다 20년대 ‘제비원소주’란 이름으로 만주, 일본 등에 수출됐다. 현재는 경북무형문화재 12호인 조옥화씨의 손길을 거쳐 빚어진다.

이밖에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당진 면천의 두견주, 율무를 증류시킨 용인 옥로주, 100일 동안 다섯 개의 독을 거치며 숙성시켜 만든 경주 교동법주 등도 전통이 깊은 민속주이다. 전통주는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등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 추석을 맞아 다양한 선물세트가 나와 있는데 가격은 1~5만원 내외이다.


단맛, 신맛, 쓴맛 등 6가지 맛

전통 약주는 발효주라는 점에서 서양의 와인과 유사하다. 전통주를 마실 때는 와인처럼 격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맛과 향, 색깔, 냄새를 함께 음미하면 한결 운치가 있다. 잘 익은 우리 술엔 단 맛, 신 맛, 떫은 맛, 구수한 맛, 쓴 맛, 매운 맛 등 6가지의 맛이 녹아있다. 좋은 약주는 이 맛들이 두드러지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술이다.

색깔은 대체로 황금색을 띈다. 엷은 색깔에서 짙은 담갈색까지 농도가 다양하다. 색깔이 옅을수록 담백한 맛을 갖는다. 색깔은 짙은 술은 진한 맛이 나며 오래된 술이다. 술은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곡물을 사용한 발효주는 만든지 100일이 지나지 않는 것이 좋다.

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누룩의 구수한 느낌이 나는 향과 과실향이다. 과즙을 전혀 넣지 않아도 잘 발효된 전통 약주에서는 사과향이나 수박향 등의 과실향이 난다. 적당한 누룩향은 품격높은 전통 약주에서 빼놓을 수 없지만, 이런 냄새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면 과일향의 약주를 고르는 것이 알맞다.

전통 약주는 보통 섭씨 8도로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백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다 더 차게, 다소 무거운 맛과 향을 좋아하는 사람은 덜 차게 마신다. 마시는 동안 온도가 변화되지 않도록 포도주처럼 얼음그릇에 두고 마시는 것이 좋다.

병을 처음 개봉할 때는 열자마자 술을 따르지 않고 잠시 기다려 병 속에 차 있던 미량의 가스를 날아가게 한 다음 잔에 따르는 것이 좋다. 술잔도 유리잔보다는 도자기잔 등을 사용하는 것이 격에 맞는다.


정성으로 빚은 술, 예의 갖춰 마셔야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술 먹는 예법을 중시했다. 때문에 술로 인한 추태와 분쟁이 거의 없었다. 술집에 노래와 춤을 추는 기생은 있었으나, 옆에 앉아 같이 마시는 작부는 두지 않았다. 또한 술자리를 반드시 공개했을 뿐 아니라 아들과 제자들을 동행했다.

전통주도의 요체는 정성을 다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며 반드시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세종대왕이 육례(六禮)중 음주에 관한 예를 가르친 향음주례에서 그 정수를 볼 수 있다.

향음주례의 정신은 첫째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 것, 둘째 음식을 정결하게 요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할 것, 셋째 행동이 분명하며 활발하게 걷고 의젓하게 서고, 분명히 말하고 조용한 절도가 있을 것, 넷째 존경하거나, 사양하거나, 감사할 때마다 즉시 행동으로 표현하여 절을 하거나 말을 할 것 등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지침들이 있다.

● 이르는 데마다 절하고 잔이나 손을 씻을 때마다 절하며 지극한 정성을 나타낸다.

● 사람이 모여 앉는 데는 위 아래가 있다. 남향과 동향일 때는 오른쪽이 상석이고 북향과 서향일 때는 북쪽이 상석이다.

● 주인과 손님이 절을 함에는 벼슬이나 학식에 관계없이 공경하는 사람이 먼저 절하고 서로 존경할 때에는 같이 절한다.

● 술자리에서 어른이 일어나 나가면 모두 따라서 돌아가는 것이 예법이다. 지루하고 난잡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 말할 때 가진 물건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말하는 것이 공경함의 표현이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09/23 13:17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