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연못'의 메아리에 세상은 귀를 열였다

흙피리를 통한 소년이 입김이 청아하고도 구성진 가락으로 살아 났다. 듣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보일듯 말듯 엷은 미소가 배어 나왔다.

경청하는 어머니의 무릎에 누운 아이가 낮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9월9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마포 이원문화센터 공연장에서는 지리산 자락에 사는 소년 한태주(16)의 별난 콘서트가 열렸다. 자신의 첫 음반이자 아버지의 네번째 음반인 '하늘 연못;의 출반 기념 콘서트다.

별난 것은 출반 홍보장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그 흔한 조명 세례도, 고출력 음향도 없었다는 점이다. 250여 좌석을 가득 메운 손님들도 화려한 나들이 옷대신 자연 염료를 들인 개량한복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그 풍경은 깎지 않은 수염과 뒤로 늘어뜨린 머릿단 등 일부 남자 관객들의 차림새와 썩 잘 어울렸다. 마이크 등 일체의 전자 기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포크와 명상이 합일된 세계에서 시간은 멈춰 서 있었다.

상투처럼 머리를 묶어 올린 아버지 한치영(48)씨가 자리를 잡아 기타를 품에 안았다. 머릿단을 길게 늘어 뜨린 아들은 옆에 다소곳이 서서 잠시 생각하더니 손바닥만한 흙피리(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했다. 투박한 몸통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의 맑고 구성진 음률이 장내를 감쌌다.

그 콘서트는 '노을꽃', '광개토대왕', '겨을 동해, 신화'등 한태주의 첫 창작 연주집 '하늘 연못'에 수록된 10곡을 처음으로 본격 발표하는 자리였다. 지리산에 부는 바람을 묘사한 '바람' 등 이날 1시간30분동안 연주된 12곡의 작품들은 우리 시대의 만파식적이었다.

조국을 사랑한 시인 신동엽의 '왕이 달마에게 물었다'에 선율을 붙인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목은 조금씩 메어갔다. "때론 길 위에서 지고 싶어/ 꽃잎이 꽃잎이 지듯이/ 때론 구르고 싶어/어디라도 아하." 섬진강에 살 때 상류의 부림천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연꽃에 내리는 비'와 '산사에서'의 차분하고도 정겨운 선율이 객석에 스며 들었다.

아버지의 노래와 아들의 흙피리 연주는 우리 시대에 일갈이었다. "가지면 가질수록 초라한 삶의 모습/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삶의 행복." 마지막 앵콜곡으로는 현란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생명의 강'이었다.


정규교육 거부하고 자연을 배웠다

한치영씨가 차분하게 이날 공연의 의의를 짚어주었다. "오늘은 태주의 출발일이기에 앞서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날입니다." 산골에 묻혀 사는 그의 가족에게 그날은 모처럼 바같 바람을 쐬는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타를 떡 주무르듯 하는 그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그는 권위주의가 싫어 기타 하나 들고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1987년 원당에서 태주를 얻은 그는 이후 식구와 함께 과천, 강원 강릉, 전남 화군, 전남 해남, 경기 양평 등지를 유랑하다 현재는 경남 하동 지리산 기슭 동네인 악양에 자리 잡았다.

개랑 한복 차림의 부인 김경애(47)씨는 피아노 연주자이다. 가정의 정서 생활을 중시하는 김씨는 "네살 때 태주에게 동요 테이프를 사 주었더니 슬픈 곡을 듣고는 한달 내내 울었다"고 기억했다. 그 아들은 정규 학교 과정을 거부했다.

양평 수익초등학교에서 오카리나를 배우고 자나깨나 연습하던 아들은 6학년이 되자 어머니에게 꼭 학교를 가야하는지 심각하게 물어 온 것이다. 이씨는 "꼭 가야할 건 없지만 그 대신 뭔가를 이룩할 결심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아들은 "음악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도 아들의 결정을 따랐다.

정규 음악 공부를 할 형편이 못 된 태주의 음악 수업은 무조건 많이 듣는 것이었다. 집 밖의 숲속에 들어가 듣는 새소리는 곧 음악이었다. 집에 와서는 월드 뮤직 음악가 '야니'의 음반이나 뮤지컬 '캐츠'를 듣고 집에 있던 간단한 신디사이저로 따라했다.

그렇다고 태주가 명상적인 소년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도 팝을 듣고 좋아한다. 그러나 또래처럼 힙합이나 발라드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진보적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사회비판적 록 음악 '더 월'을 특히 좋아하는 소년이다. 태주는 축구를 무척 즐겨 집에서 4리 길인 악양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버지와 공을 찬다.

이들은 '주말의 명화' 빼고는 굳이 TV를 보지 않는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는 이번 월드컵때 평생 볼 TV를 다 봤다"고 말했다.

그렇게 세상과 격을 두고 살아가는 태주가 어머니는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김씨는 "현재 있는 곳에서 태주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곳이 어디든 좋다"고 말했다. 김씨는 본격 공연 전 남편, 아들과 나란히 객석에 인사할 때 큰절을 올려 이채를 띠었다.


당당하고 행복한 삶

이들 가족은 이날 깨끗이 씻은 고무신을 신고 등장했지만 이들이 평소 생활 할때는 낡은 고무신의 귀꿈치를 헝겊으로 꿰매 신고 다니기 일쑤다. 그러나 얼굴에는 궁기가 없이 당당하다. 객석도 옷차림으로 이들 가족이 택한 삶의 방식에 동의를 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는 개량 한복, 남자는 긴 머리에 한복 차림이었다.

부인, 두 딸과 함께 온 박경석(37.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회원)씨는 "3년전 섬진강변 연주회에서 알 게 된 후 여덟번재 보고 있다"며 "기존의 명상 음악보다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맑아진다"며 이들부자의 음악을 칭찬했다.

이재석(66.우리것 보존협회 부회장)씨는 "자연속에서 사는 자만이 낼 수 있는 음악"이라며 "현대인에게 우리 전통 문화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환경 운동 관련자들 가운데 신나라 음반사 사장 정문교씨가 눈에 띄었다. 정씨는 "희귀 악기의 연주를 기록한다는데 앞서 최근들어 일반인들의 흙피리 음반을 찾는 수가 늘고 있다"며 "본격 상업 음반화의 가능성을 현장서 타진하러 왔다"고 말했다.

음반 '하늘 연못'은 9월10일 일반 매장 3,000장 깔렸다.


바빠진 음악적 행보, 방송출연은 사양

첫 음반을 발매한 이들 부자의 음악행보는 바빠졌다. 우선 10월 한살림과 지방 환경 단체의 초정으로 과천과 오산등지에서 연속 연주회가 기다리고 있다. 김경애씨는 "요즘 가장 힘든 일은 방송 섭외를 거절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입력시간 2002/09/2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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