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무악재

옛 서울의 서쪽관문이기도 했던 무악재. 500여년의 조선왕조 역사 흐름 속에 숱한 애환을 담고 있는 고개다.

독립문이 있는 자리에서 안산(296m)과 인왕산(338m)사이를 지나 홍제골로 넘어가는 길고도 높은 고개였다. 특히 50대 후반 세대들에겐 홍제골하면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어 더욱 을씨년스럽게 각인된 고개가 무악재다. 그 스산하게만 느껴지던 고개도 세월의 흐름에 정비례하여 땅속으로 지하철이 다닐만큼 낮아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개만 낮아진 게 아니라 길 너비도 질펀하게 넓어지고, 길 양쪽엔 건물이 즐비하다. 또 파발, 보발, 기찰도 숨을 몰아 쉬며 넘던 고개가 자동차의 물결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라고 불리기도 했고 또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렀다.

오늘날 ‘무악재’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조 초기에 도읍을 잡으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산(837m)의 인수봉(810m)이 어린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 산으로 삼아 무악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 별칭으로 ‘무학재’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하륜의 건의에 따라 무악의 남쪽을 잡았으나 반대론에 부딪혔고 결국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의견이 채택돼 북악산(342m)밑으로 결정됐다. 이런 연유로 무악재와 발음이 비슷해 무악재와 무학재를 서로 혼용하기 때문이다.

무악재는 우리 역사에 얽힌 영욕과 애환이 스며있는 고개다.

이를테면 조선조 인조 13년(1636) 병자호란을 맞아, 도성 안팎의 수 많은 청춘남녀가 볼모로 잡혀 멀고도 먼 북쪽 만주벌로 끌려가며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인질에서 풀려 난 병든 여러 군상(郡像)들이 돌아오며 오랑캐에서 더럽혀진 몸을 모래내에서 묙욕재계하고 넘어 오던 고개도 이 무악재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의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불공평한 상벌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기를 들고 넘어 오던 고개도 바로 무악재였다.

이 보다 앞서 선조 25년(1598) 임진왜란으로 왕이 의주로 몽진(夢進) 길에 오르면서 왕과 조정 중신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조선조 초기 왕사인 무학대사와 중신 정도전이 의견충돌을 벌이다 결국 조정을 떠나게 된 무학이 이 고개에서 고개 밑, 그러니까 오늘날 현저동을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세는 참으로 좋건만, 그러나 어찌할꼬! 앞으로 수 많은 선남 홀아비들이 우걸거릴 곳이로고…, 쯧쯧쯧” 그 자리에 서대문 형무소(오늘날 독립공원)가 자리했으니 수 많은 우국지사들이 갇힐 자리임을 예언한 것일까.

예전에는 대륙으로 통하던 관문이었던 무악재가 오늘 날에는 신의주로 통하는 1번 국도로서 통일가도로 이어지는 멀고도 먼 고난과 기다림의 관문이면서 동시에 모진 고개(惡峴)가 됐다. 세월이여!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10/04 11:2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