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호남민심] 호남 표심이 헷갈린다

盧風 소멸, '昌 대항마는 鄭' 인식 확산되면 심각한 딜레마

“이회창은 싫고 노무현은 좋은데 질 것 같고 정몽준은 그리 내키는 것은 아닌데 이길 수 있다고들 하니…”

호남 민심이 또 한번 거세게 요동치고 있다. 올해 초 민주당 대선 후보를 뽑는 국민경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호남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단연 이인제 의원이 앞장서 달리고 있었다. 한화갑 의원이 바짝 뒤쫓으며 얼마나 이 의원의 표를 잠식하느냐가 관심거리였고, 노무현 후보는 ‘다크호스’ 정도의 변수로만 이해됐다.

하지만 정작 뚜껑이 열리자 노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호남 민심을 등에 업은 노 후보는 두 의원을 낙마시키고 결승점에 맨 처음으로 골인한다.

호남의 중심지 광주에서 불기 시작한 ‘노풍(盧風)’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으로 전국을 강타했지만 6ㆍ13 지방선거와 8ㆍ8 재보선의 참패이후 금새 ‘산들바람’으로 변했다. 그것도 진원지 격인 호남에서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노 후보의 지지율 하락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항마를 찾던 호남 주민들에게 심리적 공황을 몰고 왔다. 이회창 후보를 꺾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 사라져간다는 불안한 마음에서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빅 카드’가 바로 정몽준 의원. 월드컵 4강 신화를 바탕으로 서서히 ‘호남심(湖南心)’을 파고 들고 있다.


‘정’ 뜨고, ‘노’ 지고

호남지역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6월 말까지만 해도 노 후보는 55.6%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정 의원은 14.4%, 이 후보는 5%대에 머물고 있었다. 월드컵 대회가 끝난 7월6일 조사에서도 노 후보 56.2% 정 의원 16.5%로 지지율의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8월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8월 12일 조사에서 정 의원이 급상승, 44.8%의 지지도가 나온 노 후보를 30.8%로 턱밑까지 쫓아갔다.

이후 ‘정상 노하(鄭上 盧下)’ 현상은 가속화돼 추석이 끝난 9월22일 조사에서 처음으로 정 의원이 노 후보를 39.3%대 30.8%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고, 9월27일 조사에서도 정 의원은 여전히 8~9% 포인트 차를 유지하며 선두에 서게 된다.

이 같은 정 의원의 호남지지도 급상승은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아무래도 정권 재창출이란 절대적 과제의 연장선상에서 옮아간 측면이 강하다. 이 시기의 세 후보를 놓고 조합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세 후보에다 권영길 후보, 이한동 의원까지 출마하는 다자간 대결 시 노무현 후보는 8월 이후 줄곧 1위와는 큰 격차를 보이는 동메달에 그치고 있고 이회창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1,2위를 다투다 9월부터 ‘이-정-노’ 순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한 때 3자 대결서도 우위를 보였던 정 의원이 2위 자리로 내려앉은 것은 호남지역의 지지율 상승과 궤를 같이한다. 호남에서 뜨니까 상대적으로 영남에서는 오히려 이회창 후보의 지지가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호남민심을 흔든 결정적 요인은 설(說)만 무성한 노-정 후보단일화를 놓고 치러진 예비 조사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 노 후보로 단일화가 되면 이 후보에 비해 평균 10% 포인트 차로 뒤지는 것으로 나온다. 8월 이후 한번도 앞선 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정 의원으로 단일화 될 경우 그와 반대로 8월 이후 거의 ‘전승’에 가까운 답이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호남민심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만 한 것이다.


민주당 내분으로 혼란 가중

그렇다고 호남 민심이 완전히 정 의원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회창을 이기긴 이겨야 할텐데 노무현을 지지하다가 갑자기 확신도 없는 정몽준으로 돌아설 수도 없고…, 하여간 민주당이 빨리 어느 쪽이던 결정을 내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요즘 호남인들의 심정이다.

정 의원에게 몰표를 주기에는 아직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신당이 창당되고 남은 기간 국민 검증을 거쳐야 할 텐데 이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배어 있다. 또 정 의원으로 돌아서기에는 뚜렷한 명분이 없는 점도 고민거리다.

노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처럼 오랜 야당생활을 통해 절대 권력과 싸워 온 ‘민주 투사’라는 동지애가 있다. 노 후보 개인의 정체성도 지금의 민주당 전신격인 13대 국회의 평화민주당과 맥을 같이한다.

호남고립 현상이 가속화된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연합의 민자당 출범에도 노 후보는 등을 돌리고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었다. 이런 정서적인 동료의식이 부산 출신이면서도 호남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주된 이유이다. 게다가 민주당이 국민경선이란 축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뽑아 놓은 후보다. 광주에서의 1위를 기점으로 우승한 주자를 광주시민이 앞장서 낙마시킨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 의원은 어떤가. 최고 재벌가의 아들이며 대기업의 사실상 주인이다. 울산에서 무소속-통일국민당-민자당-무소속 의원을 지냈고 천문학적인 자산 보유가이다. 출신성분만 놓고 보면 도저히 정서적으로 호남민심과 맞기 어렵다. 단지 주적(主敵) 격인 이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마지막 명분밖에 없다.

그래서 호남민심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실제 한 쪽에서는 “이회창이 청와대에 무혈입성하게 보고만 있을 거냐”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명분없는 정몽준보다는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인데 죽으나 사나 밀어야지”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다.

결국 호남의 표심은 민주당과 동교동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친노-반노로 갈린 민주당이 어느 한쪽으로만 손을 들어준다면 자연스레 쏠림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 단일화에 대한 파괴력은 상상외로 커질 수도 있다.

이 같은 호남민심을 읽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도 요즘 좌불안석이다. 비록 한화갑 대표가 사실상 노 후보 손을 들어줬고 민주당의 선대위 출범식을 가졌지만 당내 비노ㆍ반노세력들의 반발 움직임도 만만찮다. 금명간 후보단일화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노 후보의 기를 꺾을 태세다.

반노파들은 친노파들을 겨냥해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아직도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80년대식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반면 친노파들은 “기득권의 맛을 잊지 못해 오직 집권만을 위해 더러운 거래를 벌이려 한다”고 맞서 싸워 호남 주민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비노 성향의 중도파로 분류되는 김충조 의원(전남 여수)과 이협 의원(전북 익산)은 “노 후보보다 정 의원으로 가야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이 많지만 과연 정 의원이 끝까지 지금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의구심이 많다”라며 “한편으로는 노 후보가 어렵다고 정 의원 같은 사람을 어떻게 지지하느냐는 비판도 있다”고 현지 사정을 전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 측 김경재(전남 순천)의원은 “민주당의 불안정이 가라앉고 노 후보의 진면목이 가시화되면 호남권 부진은 일시에 해결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정 의원 측은 일단 노 후보에 동정적인 호남 민심을 놓고 직접적인 자극이 되는 언행은 피하면서도 내심 “국민통합이 최상의 선택”이라며 은근히 지지를 바라고 있다.


한나라도 민심동향에 촉각

상황이 이러자 한나라당도 고민에 빠졌다. 드러내 놓고 정 의원을 공격하다가 호남 민심이 정 후보로 모아지는 현상을 경계해야 하면서 그렇다고 상한가로 치닫는 정 의원을 마냥 놓아 둘 수도 없다.

한때 한나라당은 “DJ의 둘째 양자가 정몽준 의원”이라고 날을 세웠다가 노 후보 인기가 워낙 낮아지자 최근에는 정 의원을 민주당과 연계해 공격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문제와 현대그룹과의 연관성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대선 전쟁 속에 한 주민의 말은 호남의 바닥민심을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50년간의 영남 정권에서도 호남이 버텨낸 것은 누가 봐도 정당한 명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지라. 근디 지역화합하자고 노무현이를 뽑아 놓고 인기 없다고 이제 와서 버린다면 그건 아니재. 대 국민 명분마저 잃는다면 앞으로 호남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하이고 그저 두 후보가 딱 하나로 합친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2002/10/04 14:44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