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몽준의원 부인 김영명씨 "알고보면 나도 보통주부"

수줍음 많은 명문가 출신, 소탈하면서도 당당한 면모도

9월26일 오후 3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경동재래시장. 검은색 트라제 XG 차량에서 키가 큰 미인형의 한 주부가 내렸다. 검은색 잠바에 옅은 카키색 톤 바지의 수수한 차림, 굽이 없는 검은색 단화에는 먼지가 뿌옇게 내려 앉아 있다. 조금은 지친 듯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꺼내 시장으로 향하는 폼이 여느 주부와 차이가 없다.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46)씨. 하루 평균 7~8곳의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강행군 속에 반찬 거리도 살 겸 시장 유세도 할 겸 경동시장에 들렀다. 먼저 건어물 판매점으로 들어섰다.

“오징어 굵은 것으로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얼른 한 두점을 집어 먹는다. 주인 아주머니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오징어를 봉투에 담다가 정 의원 부인이란 말을 듣고는 “난 또 누구시라구” 하면서 반겨 손을 잡는다.

아직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시장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확실히 대형 시장이 물건도 좋고 값도 괜찮네”라며 혼잣말을 하다가 남편 찬 거리를 산다고 배추가게에 들어섰다. 배추를 고르다 “어머, 배추 속이 다 찼나 봐”라더니 얼른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이 가게 주인도 일행의 말을 듣고 나서야 누군지 알게 됐다.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청하는데 키가 너무 커서 한참을 숙여야 눈높이가 맞는다. 시장 한켠에서 웅성거리자 곧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아! 정(주영) 회장님 며느리라구? 시어머니도 여기 한참 다니셨어” 정몽준 의원보다 고 정주영 회장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40대 중반이란 나이에 비해 젊게 보여 ‘할머니급’ 상인들은 대부분 반말 투로 접근한다. “아이구, 처녀같이 너무 젊네”라는 말에 “대학생 애들이 2명 있는데요”라고 답하니 깜짝 놀란다. “남편도 잘 생겼던데, 부인은 더 예쁘네”라는 말에는 미소로 응답한다. 김씨의 시장나들이는 이렇게 나이 소개를 곁들인 얼굴 알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뛰어난 국제감각

정 의원 넷째 형수의 소개로 1978년 정 의원을 만난 뒤 1년간의 연애 끝에 부부가 됐다. 부친은 김동조 전 외무장관. 2남4녀중 막내인 김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주일ㆍ주미 대사를 역임한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3년, 미국에서 17년 살았다. 어릴 적 소꼽친구들이 별로 없는 게 속상하다고 한다.

어머니가 고교시절 농구선수를 했고 형제들도 모두 ‘장신과’에 속한다. 정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웬 여자가 지나가는데 키가 하도 커서 외국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내 자리로 오더라”라고 첫 인상을 회고했을 정도다.

김씨는 “170㎝가 넘어요”라고만 밝히고 있다. 서글서글한 마스크에 훌쩍 큰 키가 잘 조화되는 것 같은데, 정작 김씨는 키 얘기만 하면 이내 얼굴을 붉힌다. 그럴 이유가 없는 데도 내심 꽤나 고민인가 보다.

김씨는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 등이 나온 미국의 명문 웨슬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재원. 때문에 88 서울 올림픽 및 2002 월드컵 기간에도 뛰어난 사교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도왔다.

부부 사이의 2남2녀 중 장남 기선과 장녀 남이는 연세대에서 각각 경제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고교생인 셋째 선이는 미국 유학 중이다. 40세에 가진 늦둥이 예선이는 집 근처인 세검정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첫째 언니 영애씨는 미국 모건스탠리 부사장이고 셋째 언니 남편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다. 또 한국외대 교수인 오빠 민영씨는 정 의원 캠프에 자문팀으로 참여 중이다.

이튿날인 27일 오후5시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 찻집. 김씨는 약속시간 보다 20분 가량 늦게 도착했다. 기다리던 기자에게 “죄송합니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외국서의 오랜 생활이 몸에 배인 탓인지 제 시간에 오지 못한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 했다.

깔끔한 투피스 정장 차림의 김씨는 전날 받았던 ‘소탈하다’는 느낌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서구적인 느낌에 잘 정돈된 지적 분위기랄까? 하여간 전날 받았던 ‘보통 주부’와는 사뭇 다른, 장관 딸에서 대 재벌가 며느리, 대 기업 오너 및 4선 경력의 대선 후보 부인 같은 당당함이 엿보였다.


“남편은 시대에 맞는 정치인, 사심은 없어”

- 정 의원의 대선출마 결심을 놓고 반대했다고 하던데.

“집안의 중대사를 놓고 부인으로서, 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가정을 먼저 생각하게 되잖습니까. 나름대로의 제 의견을 남편에게 전달했지만 그건 방향을 정하기 이전 상황이고, 그 이후는 가장의 뜻에 따르는 게 도리이지요. 다만 언젠가는 남편이 대선 출마를 할 것이란 생각은 했는데 제 생각보다 조금 빨리 다가온 것 같아요”

- 92년에는 며느리로서 이번에는 부인으로 두번째 선거전에 임하게 됐는데.

“여러 명의 며느리 중 한명이었던 지난 선거에 비해서는 당연히 중압감이 남다르지요. 보다 적극적이 되고 사명감과 책임감도 높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노하우 같은 것은 없어요. 후보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시중에 회자되겠지만 유권자들이 후보 부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을 것으로 봐요. 그저 열심히 진실되게 하겠다는 생각뿐이에요”

- 정 의원 출마를 놓고 ‘금력에 이어 권력까지 탐을 낸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근거리에 있는 분 중에서도 서두른 감이 있다는 말을 하는 분이 많아요. 이번에는 다른 후보 밑에 들어가 그를 청와대로 먼저 보내드리고 다음에 나오면 되잖느냐는 식이예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가져가야 하는 가에 있는 것 같아요. 21세기의 첫 대선으로서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이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남편도 그런 생각에서 일에 대한 욕심만을 가지고 있을 뿐 다른 사심은 없어요”

- 정 의원이 부하직원을 엄하게 다스린다는 말이 있는데 가정에서는 어떤 가장인가.

“성격이 무뚝뚝한 편이라 말수는 적지만 엄한 가장은 아니예요. 어디서 들었는지 농담도 자주 해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런데 원체 바쁜 분이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어 제가 불평하기도 했지요.

젊었을 때는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아이들도 저도 다 이해하고 있지만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의 주장은 잘 들어주는 편이예요. 학과 선택도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요. 다만 집에 있는 시간이 적고 외부 출장이 많아 전화통화를 자주 하는 편이죠”

- 정 의원에 대해 ‘짠돌이’란 평가도 있습니다. 생활비는 어떻게 얼마나 받는지.

“매달 봉투째 주세요. (기자가 ‘의외인데요’라고 말하자 ‘놀래셨죠’라고 반문한다) 그럼 저는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하고 받죠. 아마 가장의 권위는 자금 운영을 누가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웃음) 한달 생활비 금액은 아까 말씀하신 ‘짠돌이’란 범위 내에서 상상하세요”

- 연애시절을 회상한다면.

“총 연애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한데다 대학원 때 유학와서 그런지 항상 시간에 쫓긴 분이었어요. 그래서 만난 회수도 다른 커플에 비하면 훨씬 적었고…, 어찌 보면 매우 건조한 연애시절인 편이었어요.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무뚝뚝한 게 매력이었어요. 말이 많은 사람보다 과묵한 성격이 무게가 있어 보이고 진실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여자에게도 인기가 많았대요.(웃음)”

- 넷째(7)를 너무 늦게 가지셨는데.

“솔직히 말하면 계획된 출산은 아니었어요. (이 대목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이걸 아이가 알면 실망할 텐데라고 걱정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아들이 없으세요’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늦긴 늦었죠. 하지만 요즘은 출산율이 계속 떨어져 출산 장려운동까지 한다는데 국가정책에 아주 역행하는 것은 아닌 셈이 됐죠”


“동네시장에 자주 가요”

- 본인이 주부로서 하는 역할은.

“장은 제가 직접 보고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도 제가 하지요. 동네 시장은 자주 가고 백화점도 가끔 들르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물건도 사고 흥정도 하고 그랬는데 얼굴이 조금 알려지면서부터 수월치 않아졌어요.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을 즐겨 다녔었는데…”

- 취미생활을 즐기는 편인가요.

“운동을 좋아해요. 남편과 북한산 등산도 하고 테니스와 스키도 즐기는 편이지요. 또 부부가 극장을 함께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통 가지 못해 속상하지요”

-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기억나는 영화, 애창곡 등은.

“조금 오래됐지만 임권택 감독님의 ‘서편제’가 제일 먼저 생각나네요. 연예인으로는 안성기씨와 차인표씨 팬이죠” (여기서 김씨는 ‘어머 괜히 밝혔다가 다른 연예인이 싫어하면 어떡하죠’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래는 제가 잘 못 불러요.

지난번에도 어떤 석상에서 하도 부르라고 해서 할 수없이 ‘대~한민국’만 몇번 외치다 내려왔어요” (김씨의 목소리는 조금 낮은 톤의 카랑카랑한 음색에다 부산 사투리가 섞인 말투다)

- 역대 퍼스트 레이디를 말한다면.

“주위에서 육영수 여사가 훌륭하셨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세요.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육 여사님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네요”

- 80일간의 긴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들 것으로 보는지.

“다른 후보들은 사실상 올해 초부터 대선전에 뛰어 든 셈이지만 우리는 너무 늦게 출발한 거잖아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동안 여러 사람들과 접해야 하니 두 세배로 뛰어도 모자란 상황이죠. 국민 심판을 제대로 받기 위해 남은 짧은 시간이나마 어떻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물론 체력적으로 힘도 들겠지만요”

- 선거가 오늘 끝났다면 무엇부터 하실 생각인가요.

“잠부터 푹 자고 싶어요. 울산에서의 국회의원 선거 때도 선거가 끝나면 무조건 침대로 들어가곤 했죠. 지금도 푹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 끝으로 처녀시절과 결혼 이후를 비교해 더 좋았던 시기를 선택한다면.

“(주저하다가) 아무래도 누구에게나 철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어릴 때가 더 좋은 게 아닐까요”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2002/10/04 14:59


염영남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