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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性벽'…터프걸이 뜬다

허물어진 '性벽'…터프걸이 뜬다

귀엽고 예쁜 공주이미지 벗어던진 맹렬여성들, 美의 고정관념의 변화

‘공주는 지고, 터프걸이 뜬다.’

거칠고 강한 여자들이 몰려온다. 귀엽고 요정 같은 여자 대신 스포츠를 즐기고 주먹질을 서슴지 않는 거친 여성이 아름다움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영화 ‘조폭마누라’ ‘엽기적인 그녀’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새롭게 등장한 ‘터프걸’ 이미지는 이제 영화, 드라마 시장을 넘어 여성들의 패션과 직업에까지 반영되고 있다. 신세대 여성들은 청순가련한 여자보다 씩씩하고 도발적인 여자가 되기를 더 원하는 것이다.


영화 속 강한 여성에 관객 매료

영화계는 2002년 하반기 한국영화계를 장악할 주요 캐릭터로 서슴없이 ‘강한 여자’를 꼽는다. TV드라마에서 톡톡 튀는 역할로 인기를 끌어온 소유진은 스크린 데뷔작 ‘2424’에서 터프한 여형사로 변신한다.

액션 연기를 위해 액션스쿨에서 무술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염정아는 심리 스럴러 영화 ‘H’에서 연쇄살인범을 쫒는 강력반장 역할을 맡았다. 강력반장이라면 현실 뿐만아니라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모든 장르에서 지금까지 남자의 전유물이었다. 그녀는 엽기적인 범인을 추적하는 냉혹한 이미지 조성을 위해 긴 머리도 짧게 잘랐다.

터프걸 수준을 넘어 아예 총을 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여전사의 캐릭터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동통신 CF로 신비스런 매력을 과시했던 임은경은 얼마 전 개봉된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총을 난사하는 화려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탤런트 김정화는 영화 ‘데우스 마키나’에서 인간 살인병기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다. 외국영화 ‘니키타’ 등에서나 나올법한 과감한 액션 연기를 준비 중이다. 영화사 봄의 허지희씨는 이에 대해 “청순가련형 여성 캐릭터에 식상한 관객들이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여성 모델들에 환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속 스포츠우먼의 대거 등장도 눈길을 끈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두나는 술집에 사로잡힌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유흥가에 뛰어드는 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의 ‘열혈 아줌마’로 나온다. 남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초맨’들과의 거친 격투도 마다하지 않는 드센 여자의 캐릭터다.

공효진도 영화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에서 태권사범 역으로 수준급 액션 시범을 보인다. 앳된 소녀의 이미지로 인기가 높은 손예진도 영화 ‘클래식’에서 당찬 태권도 선수로 변신한다.


드라마서도 ‘여인천하’ 위세

안방극장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사극 ‘여인천하’에서는 타이틀 그대로 기세등등한 여성들이 나라를 주물렀으며,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에서는 다소곳한 전통 여인 대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진취적이고 화통한 성격의 조선시대 여성상이 등장한다.

지난해 삼각스캔들로 연예계를 들썩이게 했던 탤런트 손태영은 9월 18일 첫 방송된 드라마 ‘리멤버’에서 검찰 출입 기자로 분해 적극적인 커리어우먼 역할에 도전한다. ‘시집이나 가라’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문사에 입사, 마약 밀수 현장 등 위험한 곳을 마다 않고 뛰어다닌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여자들의 주체성이 커지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이혜경 대표는 “과거에 비해 여성들이 자아실현 욕구가 커지면서 강한 여성을 동경하는 경향이 문화 속으로 침투한 결과”라고 말했다.


패션계도 유미섹스 붐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점령한 강한 여자들은 거리에서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올 가을 여성 패션의 화두는 터프한 매력에 초점을 둔 ‘패미큘린(FamiCuline)’ 스타일이다. 지난 봄과 여름에 맹위를 떨쳤던 로맨티시즘은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있다.

패미큘린은 패미닌(Famineneㆍ여성적인)과 매스큘린(Masculineㆍ남성적인)을 합친 신조어다. 여성복에 딱딱하고 남성적인 밀리터리 룩을 적절히 혼합한 스타일이다.

남성용, 여성용이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지면서 양성적인 이미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 새로운 ‘유니섹스 붐’이라고 부를 만하다. ‘베스띠벨리’ ‘Si’ ‘조앤루이스’ 등의 국내 브랜드와 ‘발리’ ‘구치’ ‘랄프 로렌’ 같은 해외 브랜드들을 중심으로 패미큘린 룩을 대거 선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아이템으로는 전형적인 남성복 품목인 베스트(조끼)와 턱시도 재킷, 박스형의 심플한 하프 코트, 스웨이드 사파리 재키 등이 있다. 카브라(바지단 접기)를 넓게 잡은 통바지, 블랙 슬림 수트 등도 올 가을 패션 리더들을 열광시키는 인기 아이템이다.

베스띠벨리 남명숙 디자인실장은 “여성미와 남성미라는 서로 상반되는 특성들을 조화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금녀의 벽이 허물어진다

9월 26일에는 처음으로 여성 전투기 조종사들이 탄생했다. 1997년 공군 사관학교에 입교, 5년간 전투기 조종사의 꿈을 키워온 3명의 맹렬 여성들은 이날 공군 파일럿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목에 걸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탐정’으로 통하는 20대 여성 민간조사요원이 배출된 것도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이들은 범죄심리학, 지문 인식법 등의 이론교육은 물론 강도 높은 실탄 사격 훈련까지 받은 프로들이다.

이처럼 남성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맹렬 여성들의 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대를 넘어섰고, 전문직 여성들의 활동도 많아진 요즘, 이들의 등장은 일반 여성들에게도 우리 사회 곳곳에 세워진 ‘금녀의 벽’이 사라지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대중매체나 패션 트렌드로 나타난 강한 여성상이 아직 허상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기선미 정책부장은 “강한 여성은 매스컴 속 선망의 대상일 뿐, 현실에서 대다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또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를 남성적으로 그리는 것은 은연중에 남성적인 특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더라도 강한 여성의 모습이 큰 거부감 없이 사회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현상은 최근 들어 뚜렷해진 의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배현정 기자 whitefish@hk.co.kr

입력시간 2002/10/0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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