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을 꿈꾸는 빨간마후라 여전사

한국최초 여성전투기 조종사 '5인의 여성 파일럿' 탄생

9월 26일 경북 예천 전투비행단. 비행장 한 쪽 구석에서 훈련기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여군들의 모습이 보인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동여매고 G-슈트(조종사용 특수복)를 입은 모습이 다부지다. 분을 바른 앳띤 얼굴, 고운 손, 햇살에 번쩍이는 헬멧…. 조종석에 앉은 여성 파일럿들이 쳐다보는 하늘은 전에 없이 푸르다.

푸른 하늘을 멋지게 나는 항공기 조종사는 오랫동안 금녀 분야. 더욱이 전투기 조종사는 강한 남성의 대명사였다. “격추 등 돌발상황에서도 혼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힘을 키운다”는 ‘생환 훈련’은 필수 과정이다. 그만큼 험한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전투기 조종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여성들에게 문을 닫아걸 수는 없다. 이날 예천 전투비행단에서 열린 공군 고등비행교육과정 수료식에서 공군사관학교 49기 출신 여성 장교 3명이 처음으로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 됐다.

박지연(24), 박지원(24), 편보라(23) 중위다. 1997년 공사에 입학, 지난해 졸업한 이들은 1년 9개월간의 초ㆍ중ㆍ고등 비행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앞으로 F-5 전투능력배양 과정을 수료한 뒤 전투비행대대에 배치돼 영공 방어 임무에 투입된다.

“말로만 듣던 ‘빨간 마후라’를 직접 목에 거니 가슴이 벅찹니다. 대한민국 공군으로서 명예를 빛내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라는 수식어에 ‘최고의 조종사’라는 호칭을 더하겠습니다.”


“최고의 조종사가 되겠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탑건(Top gun)에 대한 목표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박지원 중위는 동료들 앞에서 “최우수 조종사나 탑건(Top gun)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 후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를 키우는 멋진 교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편 중위는 “체력은 물론 이론적 지식을 강화해 최고의 문무를 겸비한 전투조종사가 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전투비행단에서 ‘여성 파일럿 삼총사’로 불리는 박지연ㆍ지원ㆍ편 중위들은 초음속 훈련기인 T-38과 T-59 항공기로 야간비행을 비롯해 전전후ㆍ특수ㆍ편대 비행 등 고난도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냈다. 파일럿이 필요로 하는 체력은 물론이고 리더십도 탁월하다.

박지원 중위는 사관학교 3학년 때 군수참모 생도로 근무하며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소위 시절엔 지구를 1,075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인 ‘10만 시간 무사고 비행’이라는 공군 역사에 남을만한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박지연 중위는 어릴 때부터 스릴 있는 놀이를 즐겨온 타입. 놀이공원에서 친척 오빠들도 무서워 타지 못한 위험한 기구를 앞장서 탄 겁 없는 여자애였다고 한다. “3차원적인 공간 지각 능력이 발달해 비행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는 게 그녀를 교육한 교관들의 평이다.

그렇다고 여성 파일럿 삼총사가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늘씬한 몸매에 건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자연 미인’들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반복 훈련이 다이어트 효과를 가져다 준 것. 편 중위는 사관학교 입교 후 몸무게가 7kg이나 줄었고, 박지원 중위는 10kg을 자연 감량했다.

원래부터 운동을 잘 하는 스포츠 우먼은 아니었다고 한다. 편 중위는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예ㆍ체능계 출신. 고3 때 우연히 듣게 된 최초의 여군 사관생도 모집 소식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중고 시절엔 그저 얌전하기만 한 학생이었어요. 운동도 그다지 잘 하지 못했고, 공군에 들어와 훈련을 받으면서 몰라보게 변했지요. 보다 활동적이 되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어

여성 조종사로서의 어려운 점을 물었더니 세 사람 모두 대답이 한결 같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지적한다. 비행이 생각대로 잘 안될 때, 비행기와 하나가 된 느낌을 가질 수 없을 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다.

남자 동기생들과의 육체적인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지원 중위는 “사관학교 시절 남자 생도들은 옷 갈아입는 곳만 다를 뿐, 똑같이 훈련 받고 고생한 전우들”이라고 강조한다.

남자도 하기 힘든 전투 조종사의 길에 뛰어든 여성 삼총사는 그러나 모두 미래에 좋은 아내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결혼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는 박지연ㆍ지원 중위와 달리, 편 중위는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 편 중위의 이상형은 삶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낙관적인 남자다. “밥 잘하는 남자면 더욱 좋다”고 환하게 웃음짓는다.

이날 수료식에서는 장세진(24), 한정원(24) 중위가 모든 비행과정을 이수하고 수송기 조종사가 됐다. 외국의 경우 캐나다가 1989년 최초로 여군을 전투기 비행 임무에 투입한 이래 미국, 일본, 중국, 이스라엘, 대만 등이 여성 전투기 조종사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우리 공군에서는 공사 49기 여생도 3명이 고등비행과정에, 50기생 10명이 중등비행과정에 있어 앞으로 여성 전투기 조종사들이 잇따라 배출될 전망이다.

편 중위는 “훈련시 비행기를 애인 다루듯 하라는 가르침을 많이 받는다”며 “전투기 조종사는 여성들의 매우 섬세한 판단이 요구되는 직업인 만큼 앞으로 많은 여성 후배들이 도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2002/10/07 14:35


배현정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