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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문화읽기] 철의 실크로드

9월 18일 경의선 복원 공사가 시작된 이래로 하루에도 몇 번씩 ‘철의 실크로드’라는 말을 보고 듣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경의선은 서울-평양-의주를 잇는 철도노선으로서,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의 종관철도(縱貫鐵道)를 형성한다.

일본, 한국,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교량적 성격을 가진 철도노선이기도 하다. 철도청이 발행한 <한국철도 100년사>에 의하면, 경의선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군용철도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이 경의선 철도의 부설권을 강탈하여 공사를 강행해서 1906년 4월 3일에 개통되었다.

1908년부터 급행열차 융희(隆熙)호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운행되었고, 1945년 분단으로 열차운행이 중단된 뒤에는 단축운행(용산-문산)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철의 실크로드가 디지털 인터넷 신지식인 벤처기업 등처럼 한국사회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또 다른 신화일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분명한 사실은 상상력의 지평이 순식간에 넓어졌다는 점이다. 아득히 먼 지방의 황량한 벌판으로만 기억되거나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 내리는 설원으로만 기억되는 시베리아 평원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철도는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공간적 한계를 규정하는 상징적인 표상이라는 생각을 별다른 근거 없이 가져보았다. 철도를 단순히 대중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그 문화적 역사적 함의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배움을 얻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철도를 경험한 사람은 1876년 수신사(修信使)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였다.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의하면, 김기수는 요코하마(橫濱)에서 시바시(新橋)로 가는 과정에서 ‘화륜거(火輪車)’를 탔다. 열차를 앞에 두고도 긴 행랑(行廊)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고백을 보면, 철도에 대한 사전 정보나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차의 속도는 바람과 같지만 차체의 내부는 안온해서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달리는 열차의 유리창을 통해서 산천 초목 가옥 사람 등을 보았는데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담배를 피우며 목적지까지 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초창기 한국철도의 속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1899년 9월 18일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평균 속도는 20~22Km였다. 1905년 5월 1일에 개통된 경부선(서대문-초량)의 평균속도는 26.5Km였고, 소요시간은 무려 17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바람처럼 빨리 달린다고 말했다. 수신사로서 행정적인 서비스를 제공받았던 김기수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13일 정도가 걸렸으니 17시간이라는 소요시간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것이 아니었을까. 최남선의 <경부철도노래>(1908)에도 이러한 감각이 고스란히 제시되어 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따르겠네 철도는 시공간의 변화를 가져온다. 시간의 변화가 무의식적인 차원과 관련된다면 공간의 변화는 가시적이다.

갑오경장과 대한제국 시기(1894-1910)를 거치면서 서울은 수많은 외국인들의 유입과 외국 건축물의 건설을 경험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높은 첨탑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낙현성당(樂峴聖堂:1892)과 명동성당((明洞聖堂:1898),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외국공관들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전통적인 도시경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수평적인 차원에서는 전차와 경인선이 전통적인 도성의 경계를 허물고 도시공간의 확장을 가져왔다.

특히 서대문-종로-흥인문 일대의 가로가 정비되었으며, 육조거리 끝의 황토마루를 평지화해서 광장으로 만듦으로써 서울역과 광화문을 잇는 직선대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차와 기차가 다니는 곳 또는 그와 연계된 지역은 가로가 정비되거나 평지화 작업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초창기 철도는 문명개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 침탈의 경로였다. 철도는 놀라움과 착잡함을 한없이 왕복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철도는 더 이상 식민지의 표상도 아니고 분단의 표상도 아닐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철도에 기대어 빈약한 상상력을 펼쳐보았다.

입력시간 2002/10/0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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