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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이금희(上)

가요계 틀을 깬 트위스트 여걸

이금희는 1959년 데뷔해 리마 김(金), 로라 성(成), 모니카 유(劉) 등과 함께 미8군 무대와 대학축제, 다운타운의 클럽을 통해 외국 유행음악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준 여성 팝 메신저였다.

허스키보컬로 화끈한 율동을 곁들여 들려준 그녀의 흥겨운 곡들은 부동자세로 노래하던 정적인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이금희는 ‘미스 다이나마이트’로 불리며 댄스여왕으로 군림했던 최초의 댄스가수였다.

대표 곡 ‘키다리 미스터 김’은 온 나라에 트위스트열풍을 몰고 오며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즐거움을 선사했고 지금도 국민가요 급 노래로 올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본명이 이대금인 이금희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1940년 9월15일 평북 선천에서 목회생활과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득성과 모친 임순도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었다.

해방이 되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해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통역원으로 일했던 큰오빠 이대삼이 주둔해 있던 대전을 거쳐서 부산에 정착했을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은 시대의 아픔과 궤를 함께 한 유랑의 세월이었다.

부산 성지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을 한 그녀는 공부, 운동, 음악, 무용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서울내기 다마내기’로 불렸다.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으로 군림하며 여장부로 통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했던 가요계 활동의 이면엔 좌절의 아픔이 숨어있다. 사실 그녀는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당시 음악선생이었던 오현명의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클래식학도였다. 하지만 경남여고 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합창부장을 했던 적극적인 성격은 고3 때 부친의 위암 수술로 가세가 기울어져 꿈을 키워오던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이때부터 청소시간에 팝송을 부르며 춤을 추고 학교행사에서도 가곡을 부르지 않고 팝송만을 부르는 반항적 행동을 보였다. 꿈 많고 쾌활했던 이금희는 수면제를 사 모으며 자살할 기회를 엿볼 만큼 상심했다.

좌절의 세월 중 마음을 달랠겸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와 몰래 구경 같다가 현인, 남인수, 곽순옥, 백일희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멋들어진 노래에 매료되며 인생이 뒤바뀌었다.

“특히 현인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대학은 못 가도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들면서 가수가 되려 했다”고 이금희는 털어놓는다. 부친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어머니와 큰오빠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큰오빠의 친구인 인기가수 송민도가 부산에 내려오자 아버지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송민도의 소개로 KBS방송악단장인 그의 동생 송민영을 찾아갔다. 즉석 노래 데스트에서 팝송가사를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반해버린 송민영은 3일 후 KBS 라디오 송영수PD가 담당하던 쇼프로그램에 출연을 주선했다.

겁도 없이 손시향, 곽순옥, 이종순 등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 틈에 끼어 팝송 번안 곡 ‘동창이 밝았네(It's almost tomorrow)’를 부르며 엉겁결에 가수데뷔를 했다. 그녀는 첫 출연금을 봉투 째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효심을 보였다.

시원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신인가수 이금희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눈에 들었다. 1963년 말 그의 주선으로 미8군 쇼 전문 ‘화양’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스타 쇼’에 출연하며 미 8군 가수로 거듭났다.

당시는 번안가요 전성시대였다. 이금희도 폴 앵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과 ‘싱싱싱’, ‘바나나 버트송’, ‘비빠빠 룰라’ 등 외국 번안 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이금희는 “당시 미8군 여가수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나도 큰 거울을 놓고 연습을 하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마르는 약을 많이 먹어 노래하다 쓰러지기도 했다”며 “많으면 10여 곡 이상의 앵콜을 요청 받아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노래해 목이 쉬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을 이뤄 무대화장 속 눈썹이 얼굴 사방에 흩어지기가 일쑤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또한 미8군 가수였던 막내 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와 '이씨스터즈'를 결성, TV방송에도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1965년에는 이미자, 위키리 등과 함께 월남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리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파병군인들을 열광시켰다.

월남군인과 트위스트를 추는 파격적인 사진이 외신을 타고 타전되기도 했다. 당시 정상급 가수 최희준은 “이금희 월급 반만 주면 다시 8군무대로 가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녀는 미8군 무대 최정상의 스페셜A급 가수로 도약했다. 그녀는 당시 ‘스프링 버라이어티’ 등 유명 쇼로부터 월 40회이상 공연부킹을 받아 신중현과 무대를 함께 꾸미기도 했다.

입력시간 2002/10/0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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