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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아햏햏’의 문화적 징후

[김동식의 문화읽기] ‘아햏햏’의 문화적 징후

‘아햏햏’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월드컵이 막을 내린 7월 즈음이었다. 요즘에는 조금 열기가 덜 한 듯도 하지만, 한 동안 각종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 접속해 보니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아햏햏’의 탄생설화와 관련해서는, ‘디시인사이더’(www.dcinside.co.kr)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패러디 사진을 보고 어느 네티즌이 자유게시판에 남겨놓은, 이상야릇한 신음소리 비슷한 문구로부터 ‘아햏햏’이란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아햏햏’은 여린 히흫(ㆆ)이나 꼭지 이응(ㆁ)을 선택적으로 대체하고 있는 음운으로 보인다. 두 개의 ‘ㅎ’ 받침은 묵음이나 ‘ㅇ’ 또는

‘ㅎ’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해해’ ‘아행행’ ‘아햇햇’등으로 다양하게 읽힌다. ‘아햏햏’에 내포된 음성적 다가성(多價性)은, 현실의 정형화된 원칙에 대한 얼버무리기, 비켜 서 있기, 딴 곳 쳐다보기 등의 문화적 전략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반영하고 있다.

‘아햏햏’기호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와 관련해서는 폐인으로, 수양과 관련해서는 ‘햏자’라 부른다. 자유게시판에서는 의고적인 분위기의 ‘하오체’를 사용하며, ‘방법하다(흑마술을 적용하다)’와 같이 내부적으로만 소통가능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아햏햏’는 종전의 엽기적 상상력과도 분명한 구분점을 갖는다.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인 ‘개벽’은 ‘개’가 작은 구멍으로 고개를 내민 모습을 찍어 놓은 것이다. 무겁고 거대한 것을 일거에 뒤집어 놓는 유희적인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이들은 일본의 아이돌 밴드 스맵(SMAP)의 멤버 초난강의 촌스런 분장과 패션에도 열광한다. 대책 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난 초난강의 사진에서 이들은 변신과 자유의 상징성을 발견하는 것 같다.

특히 영화 ‘취화선’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사진은 ‘아햏햏’의 정신적 지향성이 엽기와 명료하게 구별됨을 보여준다. 폭력의 한계를 폭력적으로 돌파해 가는 엽기적 상상력과는 달리, ‘아햏햏’의 체념과 달관으로 대변되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아햏햏’는 사회적으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 기호와 이미지이다. 동시에 무의미함을 표상하는 기호와 이미지에 대한 집단적인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햏햏’는 기호(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 징후이다. 기호와 이미지를 두고 의미를 묻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태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세르주 티스롱에 의하면, 기성 세대들은 기호와 이미지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무엇을 의도했던 것일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에 새로운 세대들은 이미지의 개인적인 사용의 문제로 관심을 옮겨간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여기서 무엇은 사물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인 관계’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세대들은 기호나 이미지의 의미가 아니라, 기호나 이미지를 통해서 생성 가능한 관계들에 더욱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햏햏’ 의미의 기호가 아니라 관계의 기호인 셈이다.

아햏햏에 참여하는 사람은 혼자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상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다른 잠재적 감상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햏햏는 알아들었나 못 알아들었나를 따지는 의미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지를 하나의 사물로 승인함으로써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참여의 관계로 작용한다.

아햏햏는 결코 종교적인 우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기호이자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아햏햏란 현실을 지배하는 경쟁 관계나 위계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는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체성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아햏햏라는 무의미한 기호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이 될까.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 타오이즘(taoism:도교)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시간을 두고 조금 더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입력시간 2002/10/0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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