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만 잔뜩… 결국 '병풍' 접나?

비리 입증단서 못 찾아, 면죄부 주고받기 등 정치적 타협 가능성

검찰의 ‘병풍(兵風)’ 수사가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중대한 기로를 맞고 있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한 지 두달여가 지나도록 이정연(李正淵)씨의 병역비리를 입증할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김대업(金大業)씨가 제출한 김도술씨 녹음테이프가 조작됐다는 의혹과 함께 김씨 사법처리설까지 제기, 사실상 수사종결 분위기로 몰아 가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고 테이프 감정 결과를 기다려 보라”며 막바지 계좌 추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병풍 수사의 향방은 대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테이프 성문(聲紋)분석 결과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검찰수사 물건너 갔나

검찰은 지난 두달간 정연씨 병적기록표 위ㆍ변조 의혹과 은폐 대책회의, 녹음테이프 성문 분석, 병역 면제 과정의 금품수수 여부, 군 검찰 내사 의혹 등 다각적인 수사를 벌여 왔다.

그러나 병적기록표의 경우 무수한 오기(誤記)와 의혹에도 불구, 위ㆍ변조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나 진술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3~4차례씩 소환된 병무청 및 구청 직원, 군의관 등이 착오나 단순실수라고 해명하고 있기 때문.

1차 테이프 성문분석 결과가 판정불능으로 나온 데다 대책회의나 군 검찰 내사 여부에 대해서도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렸다. 여기에 김씨가 제출한 2차 테이프가 복사본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검찰수사가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관측이 대두됐다. 일부 언론은 연일 테이프 조작설과 김대업 사법처리 전망까지 보도하며 수사종결설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병풍수사가 이대로 끝날 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검찰은 “테이프 조작설은 근거 없으며 수사는 끝나지 않았다”며 일부 언론 보도를 일축했다. 테이프 재감정 및 계좌추적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어떤 결론도 낼 수 없다는 얘기다.


성문분석이 최대 분수령

검찰 안팎의 시선은 조만간 발표될 테이프 성문분석 결과에 쏠리고 있다. 구체적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테이프는 유일한 물적 단서이기 때문. 검찰 관계자는 “병풍수사는 10여년 전 화석(化石)화한 사건의 실체를 꿰맞추는 것과 같아 테이프와 진술, 계좌추적 등을 종합 판단해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며 “성문분석 결과가 나와야 사건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1차 감정에서 대검은 ‘테이프에 의도적으로 편집된 흔적은 없지만 김도술씨 목소리의 동일인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는 어정쩡한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8월 말 원본으로 제출된 테이프도 복사본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2차 감정에서도 ‘판정불능’ 결과가 나올 것이란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실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면 병풍수사는 실체를 명확히 가리지 못한 채 종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검찰이 1차 때와는 달리 성문비교를 위해 방송사의 김도술씨 인터뷰 테이프를 확보한 데다 동일음가 단어에 대한 추가분석까지 시도하고 있어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목소리가 김도술씨 것으로 판명될 경우 검찰은 계좌추적과 함께 관련자에 대한 재조사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다만 김도술씨 신병이 확보될 때까지 ‘참고인 중지’ 형식으로 수사가 무기한 지연될 수도 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테이프가 조작된 것으로 결론이 날 경우 김대업씨에 대한 사법처리와 배후세력 수사 등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병역계좌를 뒤져라

성문분석과는 별도로 검찰이 가장 기대를 거는 부분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계좌추적. 검찰은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측근 이형표(李亨杓)씨와 김도술씨, 변재규 전 준위, 백일서(白日瑞) 전 춘천병원 진료부장, 병무청 전 직원 김영옥씨 등 정연씨 병역면제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인사들에 대한 자금흐름을 추적, 수천만원대 자금거래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주변에서는 설사 면제청탁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현금이 오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계좌추적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자금흐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뭉칫돈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의외의 수사단서가 될 수도 있다.

검찰은 은폐 대책회의와 관련, 김길부(金吉夫) 전 병무청장의 비서 박기석씨와 여춘욱(余春旭) 전 병무청 징모국장의 계좌도 주목하고 있다.

사건 관련자간 엇갈린 진술과 박씨의 잠적으로 수사가 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박씨와 여씨, 김 전 청장간 돈거래 사실이 나올 경우 충분한 추궁 단서가 되기 때문. 검찰은 사건 관련자 33명에 대해 1명당 수십건씩의 광범위한 계좌 추적을 벌이고 있어 조만간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군 검찰의 정연씨 내사 여부도 중요한 대목이다. 1999년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팀장인 고석(高奭) 대령과 이명현(李明鉉)ㆍ유관석(柳灌錫) 소령 등 당시 군 검찰관들의 진술이 극명하게 엇갈리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진 상태다. 검찰은 최후의 수단으로 고 대령의 집과 차량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군 검찰의 정연씨 내사 관련 단서가 나올 경우, 병풍수사는 의외의 방향으로 물꼬가 터질 수도 있다.


고심하는 검찰, 누구 손 들어줄까

병풍수사는 초기부터 여ㆍ야간 정치공방에 휘말려 왔고 최근 들어 언론을 통한 ‘대리전’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출신 지역과 정치 색깔 등에 따라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 그만큼 수사팀의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검찰 수뇌부도 한점 의혹 없이 철저히 수사하라는 원칙만 강조할 뿐 수사 방향에 대한 구체적 지침은 내려보내지 않고 있다. 서울지검에 일임한다는 것이지만 수사팀의 어깨는 오히려 더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왠만한 사건 관련자는 3~4차례 이상 불러 확인에 확인을 거치고 방대한 계좌 추적을 진행 중이다. 언론과의 접촉도 일체 삼가고 있다. 그러나 돌다리 두드리기식 수사를 하다 보니 ‘늑장수사’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수사팀으로서는 진퇴양난인 형국이다.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에 대한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심해 천길 낭떠러지에서 외나무 다리를 건너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어떤 검사가 병풍수사를 맡고 싶어 하겠느냐”며 “대선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라 더욱 입장이 난처할 것”이라고 혀를 찼다.

백척간두에 선 검찰은 과연 누구 손을 들어줄 것인가. 성문 분석이나 계좌추적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느쪽 손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회오리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성문분석 결과가 ‘판단 불능’으로 나올 경우 병역비리를 입증할 결정적 단서가 없어지는 셈이어서 무혐의 처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테이프가 조작되지 않은 이상 김대업씨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성문분석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정연씨에 대한 소환 등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수사 향방은 성문분석 결과에 달려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병역비리 입증은 쉽지 않다”며 “결국 적절한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겠느냐”고 말해 양측 모두에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타협안이 나올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배성규기자

입력시간 2002/10/11 14:58


배성규 veg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