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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작가 오태영, 무대로 형상화한 통일 염원

희곡 작가 오태영(54)씨가 통일 연극 3부작을 완성했다. 2002년 8월 8일~9월 1일 대학로 극장에서 ‘콩가루’를 공연함으로써 통일연극 3부작을 일단 완결했다. 오씨는 이로써 통일이란 화두를 갖고 단발성 주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제 무대에 꾸준히 직결해 온 유일의 희곡 작가로 기록됐다.

대형 뮤지컬 아니면 감각적 연극이 관객 유치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 그의 작품은 연극이 시대적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언급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하나의 답안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로 기록된다. 자칫 무거워 질 수 있는 주제지만 기발한 착상, 맛있게 씹히는 대사, 희극적 구성과 빠른 전개 방식 등 특유의 장치 덕분에 그의 연극에는 요즘 젊은 관객도 쉽게 빨려 든다.


보통사람의 눈높이로 풀어 본 통일

최근작 ‘콩가루’는 이제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지만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통일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올초 정가를 달궜던 주적(主敵)이란 문제가 이야기의 축이다. 통일 과업에서 누가 동지고 누가 적이냐를 풍자했다. 통일의 동역학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오기까지 그는 몇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오씨가 통일 연극의 기치를 대외적으로 처음 올린 것은 1999년작 ‘통일 익스프레스’이다. 극단 차이무가 3월~5월 공연했던 이 작품은 통일이란 고난도 방정식을 기발한 발상으로 유쾌하게 풀어 헤친 작품으로 젊은 층의 주목을 받았다.

비무장 지대에 남북한 비밀 왕래 통로를 만들고 상업화해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다는 가상에서 출발, 우리는 지금 통일 염원을 상업화하고 있지는 않은 지 묻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JSA’의 선배격 작품이다.

그는 “통일 담론과 통일 접근법 등 통일 논의가 국가의 전유물로 성역화돼 있던 상황에서 통일 문제를 보통 사람들의 차원으로 내리자는 의도였다”고 돌이킨다.

연출가 이상우, 배우 명계남이 새 작품을 구하던 중 당시 작품 구상차 속초에 내려가 두문불출해 있던 그의 처소를 물어 찾아 왔다. 그는 써 두었던 ‘통일…’의 원고를 건넸고 통일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풀어 헤친 그의 입담은 우리 시대 젊은 관객들의 웃음 코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자신을 얻어 그 해 10월 상경한 그가 석달 걸려 내 놓은 작품이 ‘돼지 비계’다. 총선ㆍ대선 등 선거철만 오면 갑자기 잠수함이 출현하고 간첩이 검거되는 등의 전례는 전국민을 인질로 잡아 놓고 공공연히 벌이는 권력 게임이며 그것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는 차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판문점 충돌 사태를 획책하는 국회의원과 정치 깡패의 공작에 무대의 초점을 맞췄다.

이후 석달 집필 끝에 또 다른 통일 연극 ‘불타는 소파’가 완성돼 문예회관으로 진출했다. 남한 총각과 북한 처녀가 결혼해 맞게 되는 첫날밤을 소재로 해 두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력 쟁투를 희극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여기서 소파란 쌍방이 치열한 사움을 벌이는 곳이며 동시에 한미행정협정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주변의 입김에 휘둘려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 하는 젊은 부부가 남북한의 상황을 닮았다는 공감을 끌어냈다.

그의 첫 통일극으로 알려진 ‘통일 익스프레스’는 사실 그보다 앞서 1998년에 구상한 미완성 희곡 ‘문ㆍ벽’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 작품은 제목의 분위기에서 풍기듯 통일이 일상의 삶과는 관계 없는 또 다른 영역의 문제처럼 상징화됐다. 여타 작가들의 통일 관련 작품과 다를 바 없었다.

통일을 소재로 한 연극은 분단 상황의 비극성을 소박한 휴머니즘적 시각으로 비판한 1960년대의 작품(차범석의 ‘산불’, 박조열의 ‘관광지대’ 등), 반공의 색채가 짙었던 1970년대 작품(오태석의 ‘자전거’, 이재현의 ‘포로들’, 노경식의 ‘달집’ 등)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때까지만 해도 통일은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흑백 논리의 문제였다. 6ㆍ25 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남북 대립 상황이 여전히 유효하던 때, 연극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동서 해빙 무드와 대대적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힘입어 연극은 통일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화해 나갈 수 있었다.

제도권에 의해 좌절된 남녀의 사랑으로 통일 모순을 비유한 이강백의 ‘호모 세파라투스’(83년), 6ㆍ25 이후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괴돼 온 북한 의사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한씨연대기’(1984년), 이산가족의 문제를 집중 조명한 노경식의 ‘하늘만큼 먼 나라’(“) 등이 이 시기의 성과로 꼽힌다. 같은 시기 민족극 진영은 ‘점아점아 콩점아’, ‘불감증’ 등으로 각성을 촉구했다.


연좌제 족쇄에 상차받은 청춘

오씨의 통일 연극이 생생한 것은 작가 자신의 험난했던 여정 덕택이다. 그의 청년기에는 연좌제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해방 당시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맏형은 공산주의에 심취, 6ㆍ25가 발발하자 곧 무장하고 성동경찰서를 접수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큰형은 9ㆍ28 서울 수복 바로 전날 성동구 주요 기관들에 불을 지르고 월북했다.

큰형의 뒤를 이은 사람이 둘째형이다. 둘째형은 수복 직후 용공 혐의에 몰려 마포형무소에 수감됐으나 1ㆍ4 후퇴 이후 인민군이 감옥을 부순 덕에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다 휴전 협정 직전 철수하는 인민군을 따라 간 뒤 감감무소식이다. 형들의 ‘전력’은 부조리한 현실이 되어 어느날 그를 갑자기 덮쳤다.

쉬쉬하며 지내던 가족 때문에 자기 집안의 내력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지내던 그는 경동고 1학년 때 진실을 알게 됐다.

어느날 친구집에 놀러 가자 그집 아버지가 부인한테 “빨갱이 자식이구먼”하며 문을 닫는 것이었다. 빨갱이 집안이라는 소문은 동네 안에 퍼졌다. 더군다나 동네 어른이 수박 서리 하다 잡힌 그에게 “네 큰형이 이념 문제로 네 친구의 친척을 패 죽였다. 너도 같은 놈”이라며 자신에게만 손찌검을 했다.

“현실이 싫어지더군요.” 연좌제의 족쇄를 처음으로 절감한 그는 도망치듯 군대에 입영했다. 그러나 은근히 자신을 내모는 군대 분위기에 질린 그는 탈영을 감행했다. 이틀만에 잡힌 그의 특수한 처지를 알게 된 군은 그에게 징역 1년(집행유예 1년반)과 월남 참전 중 택일을 강요했다. 퀴논의 맹호사단 수색 중대 근무 1년만에 그는 제대하게 된다. 정신병(비사회적 인격)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출구 없는 청춘기 10년을 가리켜 그는 “제 목소리도 못 내고 산 세월”이라고 한다. “지난 시절 나는 답답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내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통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옳으면 옳다고 이야기 해야 할 때입니다. 현실 논리를 직시하자는 거죠.” 앞으로 통일 연극 시리즈는 계속돼 간다.

현재 구상중인 작품은 지뢰밭에서 아슬아슬한 사랑을 나누는 남녀 이야기다. 통일 논의와 열기 속에서 우리가 못 다 생각한 부분은 없는지 등의 문제를 담담한 수채화처럼 그려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10/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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