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이금희(下)

댄스열풍 몰고 온 히트제조기

이금희의 데뷔 이전인 1950년대 말 미8군 무대에는 미스K, 먼로K라는 걸출한 한국여성댄스가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 드러누워 춤을 추고 노래하는 파격적인 무대매너로 미군들의 넋을 빼놓은 걸출한 댄스가수들이었지만 미군 장교들과 결혼 후 은퇴를 해버려 일반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금희는 “이들의 활약을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며 “노래가 흥에 겨우면 자연스럽게 가사에 맞게 움직이고 춤을 췄을 뿐 그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시공관’은 일반데뷔 무대였다. 절친했던 미8군 동료가수 이춘희와 함께 드레스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애심, 박재란 등 일반무대의 최고 가수들과 함께 출연한 무대에서 폴 앵카의 ‘다이아나’와 베니 김의 부인 이해연의 히트곡 ‘추억의 이스탄불’을 열정적인 춤과 함께 불렀다. 첫 무대부터 앵콜 요청을 받을 만큼 대중들은 이금희의 폭발적인 무대를 좋아했다.

이후 ‘이금희가 팝송을 부르면 바로 히트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가요계의 핵 폭탄으로 떠오른 그녀에게 시샘의 눈길이 쏠리며 클래식 창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청을 혹사하며 피나는 노래연습을 하면서 허스키 보컬이 됐다.

이후 송민영의 소개로 김광수 악단의 전속가수가 된 그녀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음악감상실과 미도파 백화점 옥상의 ‘21 클럽’, 고미파(화재 이전의 무학성), 유엔센터 등 당시 최고인기 무대들을 주무대로 활약했다.

161cm에 50kg대의 터질듯한 몸매에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하는 이금희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당시 수입도 대단했지만 옷 욕심이 많아 의상비로 다 섰다”고 회고했다.

대중들의 주목을 받자 박춘석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음반취입 제의가 몰려들어왔다. 이금희는 “어느 날 안경을 쓴 사람(황우루)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가요를 취입하자며 찾아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어요. 한달 간 지겹게 따라 다니며 졸라서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취입을 했는데 그게 ‘키다리 미스터 김’이에요. 내 대표 곡이 될 줄 누가 알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머금는다.

1966년 당시 황우루는 진짜 180cm가 넘는 30여명의 키다리들을 모아 국내 최초의 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이 1년 동안 방송금지라는 아픔을 겪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박대통령이 키가 작기 때문에 제 노래를 못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이금희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금희는 데뷔음반 발표 후 ‘용꿈’, ‘그것참 별꼴이야’, ‘나는 말괄량이‘, ‘치맛바람’, ‘두 줄기 길’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며 정상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1966년에는 이미자, 유주용 등과 함께 월남 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1968년엔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친선일본공연에 참가하러 출국하려다 격렬한 반일 시위를 경험한 이금희는 “일본에서 우리가수가 노래할 때 마이크 음량을 줄이는 등 훼방을 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1965년 결혼 후 이금희는 두 번씩이나 임신 5, 6개월만에 유산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셋째 윤정을 임신한뒤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모든 출연교섭을 마다하며 슬그머니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출산 후에도 연예활동보다는 딸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펑범한 어머니의 길을 고집했다.

다만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등 인기가수들의 친목모임인 ‘60회’와 ‘매미회’에는 참석해 가수들과의 친분을 유지했다. 딸의 학교 모임에만 전념한 채 애완 동물을 기르며 소일하던 이금희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84년 호텔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1987년 7월 KBS TV ‘가요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TV, 라디오 프로 출연과 수 차례 해외교포 위문공연으로 동포들의 망향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결혼 후 늘어난 몸무게를 줄이며 강한 재기의욕을 보인 그녀는 1998년 신곡과 리메이크 곡을 담은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정동극장에서 한명숙, 최양숙, 권혜경 등 왕년의 인기가수들과 함께 이틀간 공연을 하면서 “젊은 팬들의 사인요구에 가슴이 뭉클했다. 팬들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아쉬움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1960대를 흥겨운 춤바람 열풍지대로 몰아 넣었던 한국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그녀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 등 후배댄스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한 선구자였다. 그녀는 현재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설레이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딸 윤정의 뒤늦은 가수 데뷔 준비를 돕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10/14 11:4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