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고미술품 감정전문가 이상문

'귀막고, 눈과 가슴으로 판별해야'

“귀는 꼭 막고 눈만 똑바로 뜨면 됩니다. "

보이는 것만 믿는다. 누가 뭐라든 주위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다. 골동품 감정 35년 경력의 베테랑 이상문(59)씨의 철칙이다. 아무리 친절한 의뢰인의 설명이라도 이씨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들리는 대로 믿다가는 오판 확률만 높아진다. 귀는 꼭 닫고 실물로만 판별한다.

“사람이든 골동품이든 제대로 가치를 알려면 외양보다 내면을 먼저 봐야 합니다. 이완용의 작품은 어디 글씨 자체가 나빠서 푸대접을 받습니까? 오히려 당대 명필이라 할 만큼 대단히 잘 쓴 글씨지만 행적 때문에 10원의 가치도 인정 못 받는 겁니다. 얼마 전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감정가 2억원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생애와 업적을 제대로 안다면 20억, 30억원을 준다고 해도 절대 비싼 게 아닙니다. ”

이씨는 정부미술품 관리 자문위원이자, 한국고미술품협회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가? KBS ‘TV쇼 진품명품'에도 7년째 출연 중이다. 고미술품들 중에서도 특히 도자기 분야의 1인자로 알려져 있다.


기계보다 더 정확한 눈

지금까지 이씨가 감정한 작품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감정 최고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TV를 통해 소개됐던 도자기 필통. 지름 약 10cm, 높이 약 17cm의 이 작은 필통 하나에 5억원이라는 값이 매겨졌다.

골동품 감정은 주로 제작 기법이나 재질 등으로 만들어진 연대나 출처 등을 판별, 진위 여부를 밝히거나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데 쓰인다. 필요에 따라 탄소측정법과 같은 첨단 공학이 이용되기도 하지만, 기계보다 더 정확한 것이 인간의 눈.

탄소측정기는 모조품을 집어넣고도 500~600년 전의 것으로 분석되도록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 기계가 가진 맹점과 한계다. 판단 오차에 있어서도 인간이 한 수 위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예술품의 비밀을 밝히는 일, 아직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가짜 판정을 내릴 때는 특히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가짜가 진짜로 오판될 때는 최소한 나중에라도 진실이 밝혀질 여지가 남지만, 한번 진품이 위작으로 누명을 쓰고 나면 소유자의 경제적 피해나 국가적인 문화재 손실은 물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돼 영영 폐기처분되는 등 다시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 가짜의 특징이요? 가장 쉬운 예를 말하자면, 도자기의 경우 너무 ‘오버’하면 가짜입니다. 너무 때가 많이 묻어 있다든가 흙이 많이 묻은 건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인위적으로 꾸민 겁니다. 그림이나 글씨의 경우에는 끝에 이름을 쓴 글씨만 봐도 단번에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단원의 그림은 아무리 원본과 똑같이 베낄 수 있어도 단원이라는 글씨까지 똑같이 쓸 수는 없거든요. 연습 때는 완벽하게 성공을 했더라도 막상 실제로 쓸 때가 되면 누구라도 떨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위작은 원본의 글씨처럼 죽죽 뻗어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흐르는 등 글씨의 속도만 봐도 표시가 납니다.”


골동품 감정은 아직 인간 고유영역

이씨가 골동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수집 취미 때문이었다. 우표와 동전 수집으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골동품을 모으면서 20대 중반부터 골동품상을 운영, 평생 취미겸 천직이 되었다.

지나온 이력도 특이하다. 그는 고교 때 친구 2명과 함께 가족 몰래 브라질 이민단을 따라 밀항을 시도하다 들켜 집으로 돌려보내진 적이 있다.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밀항을 시도한 맹랑한 고교생들’로 이름이 올랐던 장본인 중 하나다.

세계 최고의 대형선박이 인천항에 들어온다는 뉴스를 듣던 날에도 또 한번 밀항을 시도, 실패한 전력이 있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공무원이 되기를 바랬던 부친의 권유로 철도고등학교에 진학,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도 정치에도 어울리지 않는 적성이라는 것만 확인한 채 대학졸업후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친을 닮아 사업가의 기질은 타고 난 듯했다.

이씨가 벌인 첫 사업은 양품점. 도깨비 시장에 구호물자로 나오던 짜투리 천을 사들인 뒤 직접 디자인해 옷을 만들어 팔았다. 중앙우체국 뒷골목에서 팔리던 외국 패션잡지들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낸 ‘튀는’ 옷들이었다. 4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한지 8개월만에 큰 돈을 벌었다. 기와집 한 채 값이 40만원이던 당시, 약 200만원짜리 집 한채를 사고도 현금 200만원, 600만원 상당의 재고물품과 미수금을 남겨두고 있었다.

더 큰 사업을 벌여보기 위해 양품점을 접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사업 자체는 대성공이었지만, 거래하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일껏 모은 거금을 한번에 잃었다. 뒤이어 생각해낸 것이 골동품 매매사업이었다. 원래부터 수집에 심취해 있던 터라 무엇보다 흥미가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고향인 충주에서 골동품상을 시작했다. 아직 고미술품에 대한 국내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충주에서도 유일한 골동품상이었다. 충주를 고향으로 둔 것도 일면 행운이었다.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난 이곳은 고서화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두드러지게 많은 유물을 안고 있었다. 감정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훈련 과정인 수많은 작품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감정의 눈을 빨리 뜨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 하지만 초창기에는 아주 엄청난 손해를 봤습니다. 아직 판별 능력은 없으면서 배짱은 있지, 파는 사람들 말만 믿고 무조건 사버렸다가 죄 속은 겁니다. 게다가 제가 골동품에 대해 잘 모른다는 소문이 나자 가짜를 파는 사람들이 더 집중적으로 제 주위에 꼬이는 겁니다.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하고 샀다가 막상 팔려고 보면 선배들이 잘못 샀다고 가르쳐줘서 그제서야 후회를 하지만 이미 늦은 걸 어떡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손해를 봤기 때문에 감정 실력이 빨리 늘기도 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해야 되나, 실제로 본인이 많이 속고 손해를 본 사람이 감정 능력도 뛰어나게 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수업료를 많이 내 본 사람이 많이 안다’는 말도 있습니다.”

수시로 박물관을 찾아 다니고, 관련자료도 뒤졌다. 문헌에 나와있는 가마터란 가마터는 전국의 어디든 직접 찾아가 파보지 않은 곳이 없다. 땅 속에 묻혀있는 도자기 파편들을 찾아내 사진을 찍듯 눈에 익혔다.


10대때의 수집취미가 천직으로

“ 사람의 감각이라는 건 참 불가사의한 무엇 같습니다. 워낙 많은 골동품들을 접하다 보니 나중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실물을 보기도 전에 어떤 감이 느껴지는 단계가 찾아오더라구요. 아직 도자기는 가방 안에 몇 겹이나 종이로 포장이 된 채 들어있는데도, 상대로부터 처음 가방을 받아 드는 순간 손에 느껴지는 무게감만으로도 벌써 직감적으로 ‘아, 이건 아니다’ 싶은 때가 있는 겁니다.

꺼내서 확인해보면 실제로 짐작했던 그대로구요. 감정은 이론을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감각을 훈련하자면 무엇보다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접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5년쯤 지나자 확연한 자신감이 붙었다. 대외적으로도 탁월한 감정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서울로 무대를 옮기기 전, 골동품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15년간 살기도 했다. 전문감정인을 양성하는 일본인들의 철저한 교육법을 본 것도, 외국의 활발한 고미술품 경매시장을 보며 새로운 포부를 키운 것도 그곳에서였다. 그러나 그 포부를 현실로 옮기기에는 국내 현실상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언젠가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우리나라의 항아리가 64억원에 팔렸습니다. 또 24억원에 팔린 접시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절대 제 값을 받지도, 그런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우리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세계인들에게 알려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제는 우리 문화재들이 밖으로 나가 국위 선양을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내보내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뛰어난 문화를 세계가 너무 몰라준다고 아쉬워하지만, 지금처럼 무조건 해외 반출을 막아 놓은 문화재보호법 아래에서는 앞으로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우리 문화재는 우리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구의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모든 세계인이 그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골동품 감정 시 첫 철칙은 실물외에는 아무것도 듣지도, 믿지도 않는 것이다. 골동품을 갖고 오는 의뢰인들은 으레 ‘몇 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족보해설로부터 시작해 저마다 사연이 구구하다.

그러나 감정전문가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최소한의 ‘참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당사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정보가 잘못 전달되거나 ‘윤색’되는 사례가 적지않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동란의 전흔속에서 어지럽게 살림이 뒤섞인 경우,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 엉뚱한 물건과 뒤바뀐 경우가 적지 않다. 고려, 조선시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 의뢰인의 주장도 민망하게 실제로 감정을 해보면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져 뒤늦게 낯을 붉히는 해프닝도 종종 겪는다.


세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

이씨는 여러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아 고미술품 관련 강의도 벌이고 있다. 감정에 대한 상식뿐 아니라 역사의식에 대한 남다른 문화비평으로도 인기 있는 강사다. 외국의 고미술품 경매제도를 국내에 도입, 6년전 국내 최초의 골동품 경매를 선보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재작년 ‘명품옥션’이라는 골동품 전문 경매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그는 요즘도 한 달에 한번씩 일반 애호가들을 위한 공개 경매를 열고 있다. 한번에 약 300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는, 골동품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이 드러나는 자리다. 국내에도 크리스티나 소더비와 같은 세계적 경매시장을 만들어보는 것이 이씨의 꿈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이씨의 골동품 전시장 한 켠에는 어릴 때부터 모아온 수십개의 낡은 우유병, 소주병, 분첩, 구형 라디오 등도 함께 나와 있다. 그 중 한 우유병은 50만원을 호가, 금성사에서 생산한 국내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 모델은 3,000만원짜리다.

추억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보상이다. 세월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 이씨의 수집행진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값이 비싸다고 다 문화재나 명품은 아닙니다. 자본적 가치라는 건 어쩌면 문화재의 가치를 표현하는 보조수단일 뿐,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의 영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이 바로 문화재고 명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도 언젠가는 어제가 될 수 밖에 없듯이 우리도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의 물음 앞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문화재를 충실히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10/14 14:0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