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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대통령후보의 아내란

[데스크의 눈] 대통령후보의 아내란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만큼 힘들다고 하지만 정치인들이 솔직해지기도 그에 못지 않다. 솔직하다는 것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수읽기에 나서지 않는다는 뜻인데, 자칫하면 살벌한 전쟁터나 다름없는 선거전에서 상대 후보에게 약점을 잡혀 아까운 표나 깎아먹기 십상이다.

유명 정치인 가운데 비교적 솔직하고 인간적인 사람으로는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나이드는 것의 미덕’(도서출판 끌리오)에서 “1976년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며 ‘플레이보이’지와 인터뷰에서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성에게 정염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가 지지도가 15%나 곤두박질쳐 선거에 패할 뻔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솔직하고 정직함이 대통령 재임시보다 정계를 은퇴한 뒤 더 존경받는 ‘평화와 인권 전도사’ 카터를 만든 요인인지 모른다. 카터의 은퇴 후 성공에는 또 아내 로잘린의 내조가 컸다. 쉰여섯의 ‘젊은’ 나이에 백악관을 나온 고급 실업자 카터는 가는 곳마다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좌절감과 허탈함을 아내와의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이겨냈다고 말했다.

땅콩 농장주의 부인에서 백악관 안주인이 되기까지 늘 남편 곁을 지켜온 로잘린인들 어렵지 않았겠는가? 1980년 대선에서 패한 뒤 로잘린은 ‘낙선’이란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극심한 분노와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남편이 재임기간에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비롯, 중동분쟁 해결의 돌파구를 연 캠프 데이비드 협상,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 체결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에 대한 실망과 충격을 삭히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을 딛고 일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자서전을 집필하는 등 거침없는 내조로 남편의 뒤늦은 성공을 돕는 부덕(婦德)을 발휘했다.

지난 4월 프랑스 대선에서 고배를 든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의 아내 실비안 아가친스키. 사회당 후보로 나선 남편이 1차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극우파의 장 마리 르펜 후보에게 밀려 결선투표 진출이 좌절된 후 남편의 대권 도전 과정을 그린 ‘중단된 일기’를 펴냈다.

로잘린 못지 않게 충격을 받은 아가친스키의 분노와 울분이 ‘중단된 일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녀는 “좌파(사회당)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분열과 투표 불참이었다”며 연정의 파트너였던 녹색당과 공산당을 겨냥했고 “조스팽은 유세 중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도덕성을 발휘했지만,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다”며 시라크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아가친스키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자제력을 잃다시피 한 그녀의 ‘한풀이’식 글쓰기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의 아내들은 선거전이나 후에 비교적 조용하게 남편을 돕는 편이다. 남편이 손길이 닿지 않는 여성관련 단체나 불우이웃시설 등을 돌며 착실하게 점수를 따는 스타일이다. 언론도 거의 후보 부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않는다. 역대 퍼스트 레이디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분이 육영수 여사라는 점도 ‘조용한 내조’형 후보 부인을 선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후보의 아내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 동안 의도적으로 언론을 피해온 김영명(정몽준 의원의 부인)씨가 적극적으로 카메라 앞에 나서면서 과거와 다른 ‘부인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중에도 A부인은 XX형, B부인은 XX형이란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에 맞춰 주간한국은 대통령 후보 부인들에 대한 연쇄 인터뷰를 기획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부인 권양숙씨, 그리고 김영명씨 등에게 기획의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독 한씨측만 인터뷰를 사양했다. 김씨와 권씨의 인터뷰가 실린 뒤에도 한씨측은 한사코 만남을 거절했다.

물론 한씨측에도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만 해도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ㆍ지구당 위원장ㆍ광역 및 기초단체장 부인 연찬회에서 한씨가 “하늘이 두쪽이 나도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해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한씨의 발언은 지난 5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병풍’(兵風)에 대한 억울함과 울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지만 여론은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론 앞에 나서지 않는 것만이 능사인가. 로잘린은 솟구치는 울분을 따뜻한 마음으로 삭힌 뒤 밝은 얼굴을 내보임으로써 카터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데 기여했다.

또 한나라당 주변에는 “한인옥이 나서면 무조건 손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2002/10/1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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