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문화읽기] 포르노그라피의 왜곡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듯이 지난 2~3년간 한국 영화의 주류는 조폭영화였다. 한국의 조폭영화는 조폭의 실체를 괄호에 넣은 상태를 전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홍콩 느와르와는 달리 처음부터 낭만화·희화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폭을 표현해야 하는 별다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문화산업적 자본에 의해 하나의 아이템으로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폭영화는 결국 조폭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입증하지 못한 채 영화판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조폭영화가 환영을 받았던 것은 문화산업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짜 조폭이 아니라면 누구도 암흑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웬만한 황당함은 처음부터 시비거리가 될 수조차 없다.

또한 사회적 억압에 대한 기본적인 설정에 약간의 휴머니티만 곁들여 놓으면 낭만적인 반항아를 만들어 내는 일은 거의 일도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허술한 스토리는 화려한 액션으로 메울 수 있고, 음모와 배신을 통한 극적 반전의 제시는 식은 죽 먹기에 가깝다.

한국에서 조폭영화는 액션, 멜로, 낭만적 반항, 엽기와 코믹이 한꺼번에 제공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모듬 정식 내지는 비빔밥이었다. 하지만 관객과 제작자들의 입맛이 조폭영화라는 메뉴에서 조금씩 이탈하고 있는 것 같다.

2002년 가을 한국 영화의 코드는 무엇일까. 조폭을 몰아낸 것은 다름 아닌 성(sex)이다. 조폭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코믹물이나 멜로물이 잠깐씩 선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동향만을 놓고 보자면 영화의 코드는 성으로 확실하게 그 무게중심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노인들의 성과 사랑을 현미경적인 시선으로 다루었던 <죽어도 좋아>, 남성 동성애를 진지하게 접근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로드무비>, 16mm 에로영화의 문법에다가 이름 알려진 배우들을 캐스팅한 <마법의 성> 등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로 명성을 날렸던 변영주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 <밀애>에서 격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정사신의 연출에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은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시동생과 형수 사이의 위험한 사랑을 다루고 있는 <중독>은 멜로적인 분위기 속에 파격적인 정사신을 삽입했다고 해서 개봉도 되기 전서부터 화제이다.

한국 영화가 성이라는 주제를 탐색하는 것은 결코 탓할 일이 못 된다. 성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된 표현이 억압되어 왔던 역사적 과정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최근의 한국 영화는 성과 관련된 표현의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장해 가고 있으며, 상당한 자본과 유명 배우의 캐스팅을 통해서 성의 문화적 중요성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성적 상상력의 중심에는 포르노그라피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혼외정사든 혼전관계든 간에 정사장면은 포르노그라피적인 현미경적인 시선에 의해서 포착된다. 이러한 현상들을 두고 한국 영화의 포르노그라피화, 또는 포르노그라피의 부분적 도입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도는 계절에 뜨거운 숨결이 오가는 영화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고 뭔가 찜찜한 대목이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파격적인 노출과 다양한 체위는 결국 문화산업 자본이 선택한 그다지 새롭지 않은 메뉴가 아닐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영화가 반드시 사회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여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한국 영화가 포르노그라피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양상에 대해서도 별다르게 시비 걸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포르노그라피가 성교 장면을 담은 필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육체에 대한 극한적인 탐색이라는 사실만큼은 기억되었으면 한다.

누가 얼마나 벗었나와 같은 선정적인 관심이 아니라, 성과 사랑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성숙한 시선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옷 벗어가며 열심히 찍었다만 가지고는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문화적 기대가 영화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바보 같은 기대일까?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2/10/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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