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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권, 브라질서 꽃필까

사회주의 정권, 브라질서 꽃필까

10·6 대선서 좌파노동당 룰라 1위, 결선투표 결과 세계이목 집중

10월 6일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에서 좌파 노동당(PT)의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54ㆍ일명 룰라)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 27일로 예정된 결선투표에서 최종 당선자가 확정된다. 당초 결선투표에서 접전이 예상됐으나 군소 후보들이 잇따라 룰라 지지를 선언해 브라질 최초로 정통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의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미국 등 국제 사회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남미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인 브라질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경우 예상되는 충격파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거침없는 개혁 공약으로 빈민층의 절대 지지를 얻고 있는 그가 과연 실업률, 범죄 등 사회불안을 해소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등 해외 자본과 원만히 경제 재건을 논의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반득표 실패 불구 대세는 룰라에게

10ㆍ6 대선 직전까지 관심은 룰라의 과반수 득표 여부였다. 올들어 꾸준히 30%대의 지지율로 독주를 이어온 룰라는 9월을 넘어서면서 인기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그 동안 룰라의 주요 반대세력이었던 일부 은행가와 기업가들이 이례적으로 선거 막판에 룰라 지지를 선언하면서 10ㆍ6 선거 직전 일부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50%를 상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47%의 지지. 전문가들은 예상에 못 미친 득표율을 브라질 중산층의 좌파 후보 당선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했다. 토지 몰수, 부의 재분배 등 혁명에 가까운 그의 주장은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거머쥔 기득권층에겐 늘 거부의 대상이었다.

유권자의 90% 이상이 투표에 참가해 높은 관심을 보인 10ㆍ6 선거에서 집권 연립여당인 사회민주당(PSDB)의 조제 세하 후보는 2위(23%), 사회당(PSB)의 안토니 가로징요 후보는 18%, 사회민중당(PPS)의 시로 고메스 후보는 12%로 각각 3, 4위를 차지했다.

1998년을 비롯, 94년과 89년 3번의 선거에서 모두 선거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막판에 역전을 허용했던 룰라는 선거 직후 결선투표를 겨냥, “노동당의 진짜 승리는 최종 당선”이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3전4기’의 룰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올 대선은 룰라에게로 사실상 대세가 기울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선거 후 여론조사 결과뿐 아니라 3,4위를 차지한 군소 후보들마저 잇따라 룰라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차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한 PPS의 고메스 후보가 “룰라 당선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선언한 데 이어 3위의 가로징요 후보도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노동자 출신, 브라질 좌파의 역사

룰라가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뚝이와 같은 그의 인생 역정이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브라질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낮은 북동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땅콩장사와 구두닦이로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인데다 수업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10살이 돼서야 간신히 글자를 깨우쳤다. 끼니를 잇기 위해 상업도시인 상파울루로 이주한 그는 인근 철강공장의 금속노동자로 들어가 일을 배우다가 1960년대 중반 사고로 왼손 새끼 손가락을 잃었다.

여느 보통사람과 다름 없이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그가 투사로 변신한 계기는 69년 같은 공장 노동자였던 첫 번째 아내의 죽음이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얻은 결핵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치료비가 없어 지켜봐야만 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노조 활동에 투신했다. 75년 10만 명 규모의 철강노조 위원장으로 당선된 그는 ‘어용’으로 불리던 노조를 강력한 독립노조로 탈바꿈시켰다.

룰라의 인생역정은 브라질 정통 좌파의 산 역사나 마찬가지다. 30년대 정치권의 주창으로 탄생해 60년대 조아우 굴라르트 대통령을 끝으로 명맥이 끊겼던 기존 좌파 정치세력과 달리 룰라가 80년 노조와 좌파 지식인, 가톨릭 운동가들의 지지 속에 출범시킨 노동당은 강한 색채의 정통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노동당은 정치인이 아닌 노동자가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새로웠고, 사상도 마르크스 주의가 아닌 급진적 민주주의를 채택했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브라질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자는 주장은 이념이라기보다 현실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룰라의 부상을 ‘브라질 민주화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노동당의 성장은 극소수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민주주의를 전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는 의미에서다.

세계적인 사회주의 몰락의 바람 속에서도 노동당은 89, 94, 98년 3차례 대선에서 룰라를 2위에 올려놓으면서 상파울루 등 6개 대도시 시장과 60여 명의 하원의원을 확보하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브라질의 블레어’, 경제가 앞날 좌우

룰라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는 암울한 브라질의 경제상황이다.

지난 8년간 페르난도 카르도수 정권이 실시했던 이른바 ‘헤알 플랜(Real Plan)’은 한때 2,500%에 달하던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을 97년 한자리 숫자로 잡을 만큼 성과를 거뒀지만 98년부터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헤알 플랜은 ▦고정환율제 도입 ▦국영기업 민영화와 사회복지 축소 ▦신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한 시장 개방 등으로 요약되는 정책. 하지만 물가 안정을 위해 추진했던 고금리 정책으로 기업의 투자심리가 위축됐고 99년 1월 미나스 제라이스주의 대 연방 부채 지불유예 선언으로 중앙은행이 외환위기에 처하면서 브라질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헤알화는 올들어 40% 넘게 폭락했고 최근에는 2,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 공공부채에 대한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까지 거론되고 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개방의 성과가 불평등하게 배분되면서 빈곤계층은 더욱 늘어났고 국민 평균생활 수준도 실업과 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악화해 왔다.

경제상황은 룰라의 부상으로 더욱 악화하고 있다. 좌파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국제 금융자본의 유출을 부추겨 1차 투표 이후 브라질 경제는 환율, 채권, 증시 모두 곤두박질 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주에만 브라질의 채권 가격은 11%, 환율은 3.7%, 주가는 1.49% 급락했다. 열악한 경제를 발판으로 떠오른 룰라가 오히려 경제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역설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의 블레어’(중도노선을 표방해 성공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룰라를 빗댄 말ㆍ타임지)라는 평가까지 받으며 일약 새로운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룰라의 브라질에 대해 외신들은 섣부른 전망을 삼가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집권 후에도 불황이 계속될 경우 그가 과연 지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용식 국제부 기자 jawohl@hk.co.kr

입력시간 2002/10/1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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