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지구촌 인권·분쟁 조정에 헌신한 평화전도사

‘가장 무능한 대통령에서 가장 화려한 전직대통령으로.’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미 카터(78) 전 미국 대통령을 지칭할 때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대통령 퇴임 후 골프나 돈벌이 강연 등으로 소일하는 다른 대부분의 전직들과 달리 카터의 은퇴 후 활동은 마치 재직 당시의 불명예를 만회하려는 듯 역동적이고 가치지향적이다.

노년에 보여준 정열과 대담성을 집권 시 통치에 활용했다면 현직에서도 훌륭한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은퇴 후 인권과 민주화, 빈곤퇴치를 위한 그의 헌신적인 민간활동 덕분이다. 1977~81년 4년 임기를 끝내고 56세라는 ‘젊은 나이’ 로 퇴임한 카터가 재임 중 거뒀던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78년 30여년 동안 단절돼 왔던 중국과 미국 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이듬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인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성공시킨 것이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소용돌이가 정국을 뒤흔들던 77년 “나를 믿어달라(Trust me)” 며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퇴임 때 남긴 것은 오일쇼크에 높은 실업률이었다.

특히 79년 이란 회교혁명 당시 인질로 잡힌 미국 대사관 직원 66명의 석방을 놓고 그가 보여준 외교정책은 무능과 우유부단함의 전형으로 비난받았다. 굴욕적인 협상 끝에 최후카드로 꺼내든 특공대 투입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차기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 땅콩농장으로 귀향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100만 달러가 넘는 빚더미가 전부였다. 극심한 패배감과 재정적 압박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가 후에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고 술회한 당시가 민간 인권대사로서의 빛은 발하는 출발점이 됐다.


퇴임 후 빈손퇴치 민간활동

82년 비정부ㆍ비영리 기구로 설립한 카터 재단을 이끌면서 ‘평화 가꾸기’‘질병과 싸우기’‘희망만들기’를 3대 슬로건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볐다. 철저히 정치색을 배제한다는 초당적 원칙은 카터 재단을 비정부 민간단체의 모범으로 끌어올렸다.

분쟁지, 민주선거의 실험이 있는 곳이면 그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90년대 보스니아 사태 중재자로 일했고 99년에는 우간다와 수단의 평화협정을 이끌었다.

멕시코 페루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동티모르 등 선거를 감시하는 국제사회의 눈과 동일시된 카터의 동선(動線)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를 사랑과 인권의 전도사로 더욱 주목하게 한 것은 집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for Humanity)’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지난해 8월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올 6월 남아공 더반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JCWP) 2002’ 사업을 출범시켰다. 카터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한 4,5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남아공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18개 국가에 올해말까지 1,000여 채의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지금도 벌여나가고 있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강직성과 도덕성을 확인시켜 준 다른 하나는 조지 W 부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현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평화상 수상은 부시 정부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돼야 한다” 는 노벨상위원회의 이례적인 언급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올 1월 연두교서에서 터져 나온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미국 전역이 강경보수로 회귀하는 상황에서 그는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비생산적인 것”이라며 부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야당인 민주당조차 발언 수위에 놀랐을 만큼 그의 발언은 국제사회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권, 중동정책, 대 이라크 확전 등도 구체적 논의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일침을 가했다. 조지아주 자택에서 밝힌 수상소감에서 그는 “내가 상원에 있었다면 의회 결의안에 반대했을 것” 이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부시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얼굴을 맞댔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미국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한 그는 수많은 쿠바 시민을 앞에 놓고 미국에게 교류와 봉쇄해제를, 쿠바 정부에는 인권과 민주화를 강도높게 주문했다. 수십명의 쿠바 반정부 인사를 만나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그의 파격적인 일정에 대해 쿠바 정부도 고개를 저을 만큼 그의 행보는 대담했다.


평화상 무용론 거론 시점에 의미있는 수상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한국 국민의 뇌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김일성 북한 주석과 동시에 그가 떠오를 정도로 카터는 한국 현대사에 부정할 수 없는 짙은 발자취를 남겼다.

취임 직후 민주화와 인권을 박해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주한 미군 철수를 추진, 한미관계는 79년 6월 서울 한미 정상회담 개최 이전까지 2년여 간 파행으로 치달았다. 15년 뒤인 94년 6월에는 전직 대통령으로 평양에 갔다.

북한의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 후 조성된 한반도 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였다.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앞에서 김 주석 전용 요트를 타고 회담을 벌인 그는 핵사찰 수용이라는 중재안을 도출했다. 같은 해 8월 남북정상회담 개최라는 수확도 얻었다.

하지만 카터와의 회담 4개월만에 박 대통령이 79년에 부하의 총탄에 숨진 것처럼 김 주석도 94년에 카터와 만난 지 2개월도 채 못 돼 사망, 김 주석과 김영삼 당시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80년대 초반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열렬한 야구광이기도 해 7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노사분쟁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던 카터의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은 최근 평화상 무용론이 부상할 만큼 신뢰성에 상처를 받고 있는 노벨평화상에 모처럼 단비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치인에게는 평화상 주지 말자"

카터의 이번 수상 이전 수년동안 노벨평화상은 “정말 평화를 위한 상이냐” 는 비판이 나돌 정도로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말그대로 수상자가 인류평화에 기여했는지, 그리고 수상자의 의도가 진정한 것인지에 대한 엄정한 통찰이 부족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이다. 정치인에게 평화상을 주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대두됐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평화상 수상을 하루 앞둔 11일 ‘Nobel_esse oblige(노벨상의 의무)’ 라는 사설에서 “역대 수상자 중 평범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며 전혀 업적이 없어 보이는 정치지도자들이 상을 받기도 했다” 며 평화상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불법적으로 캄보디아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칠레에서 쿠데타를 사주한 헨리 키신저 미국 전 국무부 장관에게 73년 평화상이 돌아간 것이 대표적인 ‘불행한 선택’으로 지적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등 가장 호전적인 두명의 지도자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과도정부 총리가 이번 후보에 올랐던 것에 대해서도 “이들이 확실한 공로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황유석 기자

입력시간 2002/10/18 16:53


황유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