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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의 노벨상시대 열렸다

보통사람의 노벨상시대 열렸다

문학상에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 의학상 등 수상자 발표

10월 중 지구촌 최대 이벤트인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끝났다. 가장 먼저 발표된 노벨 의학상은 영국인 시드니 브레너(75)박사와 존 E 설스턴(60), 미국인 H 로버트 호비츠(55) 교수가 인체 장기의 성장과 세포의 죽음에 관여하는 핵심 유전자들을 규명해 낸 공로로 공동 수상했고, 물리학상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데 기여한 천체물리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일본 도쿄대 고시바 마사토시(76) 명예교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레이몬드 데이비스 2세(87) 명예교수가 주인공.

이들은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우주 중성미자(中性微子)의 존재를 규명하고,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특히 고시바 교수는 한 폐광 지하에 중성미자 망원경을 설치하고, 수 십년간 우주의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등 무모할 정도의 끈질긴 집념을 보여주었다.


노벨상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2002노벨상 발표에서 최고의 스타는 역시 존 펜(85·미국 버지니아 컴온웰스대), 쿠르트 뷔트리히(64·스위스취리히 공대) 등과 함께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 (田中耕一· 43)씨.

도호쿠(東北)대 학사가 최종학력인 그는 일반 기업(일본 시마즈(島津)제작소 분석계측사업부 라이프사이언스 연구소) 연구원으로 세계적인 석학도 받기 힘든 노벨상을 거머쥐며 ‘보통 사람의 노벨상 시대’를 열었다.

다나카는 노벨상 위원회가 수상 사실을 통보했을 때 ‘회의 중’이었다고 한다. “중요한 전화라고 해서 받았지만, 영어로 ‘노벨’ 어쩌고 해서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다”고 고백했다.

발표 당일( 10월 9일) 밤에 작업복 차림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온 그는 “주위에서 ‘축하한다’고 말해 “아니, 스웨덴에 노벨상과 비슷한 상이 또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TV에 자신의 얼굴이 나온 것을 본 뒤 노벨상 수상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 중 걸려온 전화를 받고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고 끊은 뒤 “죄송합니다, 아내였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겨 TV생중계를 지켜본 일본 아줌마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또 ‘노벨상은 성적순이 아니다’는 점을 실증했다. 대학시절 그는 낙제를 해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졸업했고 그나마 전공(전자공학)을 살리려고 가전업체인 소니의 문을 두드렸으나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 생소한 생화학 연구를 하게 됐다.

물론 유학경험도 없다. 외국물이라면 최근 영국의 자회사에서 근무한 정도. 그의 걱정은 “시상식장에서 영어로 연설시킬지 몰라 걱정”이라는 것이다. 회사안에서의 평가도 ‘비상한 천재’ 혹은 ‘연구실을 떠나지 않는 노력파’가 아니다. 그저 ‘친근감 넘치는 사람’, ‘아이디어 좋은 사람’ 정도이다.

노벨 화학상이 발표된 날 일본종합과학기술회의에는 수상 내용을 해설하기 위해 200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시라카와 히데키 쓰쿠바대 교수 등 석학 3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다나카라는 인물을 몰라 다나카에게 직접 수상 내용을 물어본 뒤 2시간 뒤 해설을 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의 수상 공적은 단백질의 분자크기 측정법 개발이다. 단백질은 분자의 크기를 아는 것이 생물연구와 약품개발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측정이 쉽지 않았다. 다나카는 바로 그 분자량을 획기적으로 쉽게 측정할 수 있는 ‘소프트레이저 이탈법’이라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측정기는 대학생 정도면 쉽게 분자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격찬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다나카가 1987년 대학을 졸업한지 겨우 4년이 지난 약관 28세 때 이 이론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이 그러하듯 그도 연구소 동료들과 실험하다 실수로 글리세린 액체를 코발트 분말에 떨어뜨렸는데, 커다란 분자의 이온이 관측되는 것을 발견, 이론을 정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 기술의 개발로 회사에서 받은 돈은 특허등록 때 1만1000엔, 다른 동료들과 공동 표창장을 수상할 때 받은 10여만엔이 전부다. 또 동기들이 부장·과장으로 승진할 때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며 승진 시험을 거부했다.

그런 그가 노벨상을 받자 일본은 ‘노벨상급 인재’를 평범한 한 기업체의 ‘주임’으로 취급했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그의 직장 상관은 “이제 우리 주임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되나”며 당황했다고 한다.


문학적으로 재조명한 아우슈비츠 체험

한국인들이 큰 관심을 갖는 노벨 문학상은 나치 치하 수용소 체험을 문학적으로 조명하며 인간의 생존력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발표해 온 유대계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72)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발표문에서 “케르테스에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정상적인 서유럽의 역사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었다”며 “그것은 현대의 실체 속에서 발생한 인간 타락에 관한 궁극의 진실이었다”고 평가했다.

1929년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케르테스는 10대 시절인 1944년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경험했으며 이후 부헨발트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종전을 맞았다.

1948년 부다페스트의 일간지‘빌라고사그’기자가 됐지만 공산화로 이 신문사가 헝가리 공산당 기관지를 표방하면서 해고됐다. 케르테스는 이후 작가의 길로 들어서 자신의 수용소 생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발표했다.

몇 년 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콘라드 죄르지와 함께 헝가리 현대 문학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그는 “항상 새로운 소설을 구상할 때마다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고 밝힐 정도로 작품의 근저에는 유대인 수용소가 자리하고 있다.

수상작품은 1975년 발표된 그의 첫 소설 “소르슈탈란사그(Sorstalansag;Fateless.비운(非運)”. 이 소설은 15세 유대계 소년이 체포된 뒤 수용소로 이송돼 고초를 겪으면서도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 남았고 종전 후 수용소 체험의 고통을 안고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85년 재판을 출간하면서 일약 유명해졌으며 96년에는 독일어로 번역됐다.

그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사는 것은 곧 순응하는 것”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한 여건에 사람들이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로 모든 인간들에게서 발현되는 ‘환경에 대한 순응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운’(3부작) 후에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길을 발견한 사람’(1977),‘좌절’(1988),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1990) 등을 잇따라 내놓았다.

배현정 기자 whitefish@hk.co.kr

입력시간 2002/10/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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