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연극무대에서 익어간다

섹스, 귀신, 넘버 쓰리의 애환 등 다양한 소재의 공연 줄이어

“그거 아세요? 오럴 섹스를 하는 부부들이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훨씬 덜 싸운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요. (중략) 광고업자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성적 이미지를 끼워 파는 지 모르시죠. 아니, 노골적이라는 말이 더 맞겠네요. 먹는다, 빤다, 탄다, 한다…” 30대 후반의 이혼녀 한인혜가 유부남 진웅에게 하는 말이다. 성불능에 빠진 40대 초반의 교수 이진웅은 그녀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탐색하고 있다.


삶에 있어서 섹스는 무엇인가

극단 산울림의 신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새롭게 형성돼 가는 성 도덕 풍경을 전문직 남녀를 통해 들여 다 본 작품이다. 성불능인 남자와 헤어진 37세의 광고 카피라이터 인혜는 홀로 된 후 여러 남자를 만난다. 그것이 삶을 행복하게 하는 일종의 게임이라 생각하는 그녀의 신앙은 육체의 감각이다.

이 시대, 결혼 제도란 무엇인가? 사회적 안전판으로 작용하는 관습인가, 성을 억압하는 인습인가? 극의 말미, 인혜는 이혼 한 친구가 부쳐 준 편지를 읽는다.

“…원시적이고 강렬한 자연과 직접 교감하며 배꼽을 맞대고 우주의 맥박을 느껴 보고 싶다는 갈망…” 흡사 DH 로렌스의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을 방불케 하는 이 대목은 성의 회복이 삶의 정체성을 되살려 주는 것이라는 테마를 압축하는 부분이다.

톡톡 쏘는 말맛은 2001년 문이당에서 출판된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 이미 확인된 바다. 여류 소설가 김형경씨가 2001년 발표한 소설을 방송 작가 전옥란씨가 각색했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담배 피우는 여자’ 등 자신의 두 장편이 연극화됐던 소설가 김씨는 “연극으로 내 작품을 볼 때마다 극적 상상력에 스스로 놀란다”며 세번째 무대에 큰 기대를 건다. 임영웅 연출, 전옥란 각색, 이항나 박지오 등 출연. 10월 29일부터 산울림소극장.,


노총각들의 처녀귀신 이야기

이번에는 평소 듣기 힘든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로 펼쳐지는 노총각들의 처녀 귀신 이야기다.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동해안 허름한 카페에서 펼쳐지는 객담 같은 귀신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사고로 딸을 잃어버린 아주머니 귀신, 죽어서도 첫사랑이 가슴 아픈 노총각 귀신 등등 갖가지 귀신이야기로 밤은 깊어 간다. 얼핏 북한말을 닮은 강원도 사투리가 별미다. 코너 맥퍼슨 작, 이상우 연출. 11월 3일까지 동숭아트센터소극장.


3류복서의 살아가는 법

전적 25전 10승 15패의 3류 복서 봉세는 시합이 없을 때면 흥신소 일을 해 생활을 꾸려 나간다.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먼데이 pm 5:00’은 봉세가 상징하는 우리 사회 넘버 쓰리들의 일상을 통해 잃어 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권투의 이미지는 이 연극에서 매우 중요하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호황을 누리다 요즘 들어 ‘넘버 쓰리’의 상징처럼 돼 버린 권투는 복고적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링을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으로 무대를 갈라 시합 상황(링 안)과 현실(링 바깥)을 나란히 두고 교차시킨다. 조명이 켜지고 꺼짐에 따라 관객의 시선을 링 안과 링 밖으로 유인한다. 포스트모던적 전략이다. 박성철 작, 최명수 연출. 10월 20일까지 아리랑소극장.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신파’

중장년을 위한 무대도 기다린다. 극단 후암의 ‘눈 나리는 밤’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객석을 끌고 간다. 집을 나간 아편 중독자 남편을 찾으러 갓난 아이를 버리고, 그 죄값으로 남은 자식과는 생이별을 한 어떤 여인의 이야기다.

그러나 남편은 어떻게 알고 와서 그녀를 괴롭힌다. 여인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남편을 죽이게 되고, 그래서 열린 재판장은 눈물 바다가 된다. 마이크 든 변사의 진행으로 공연돼 온 기존의 악극과 달리 이번에는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순화한다. 추억의 뽕짝 음악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에 더욱 비중을 둘 예정이다. 전옥 작, 차현석 연출. 11월 10일까지 인간소극장.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0/1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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