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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박인수(上)

[추억의 LP여행] 박인수(上)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계의 풍운아

1960년대 중반 미8군가수로 출발해 1970년대 공전의 히트곡 <봄비>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솔 가수로 군림했던 풍운아 박인수.

그는 임희숙, 펄시스터즈,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 등 후배들의 음악영웅이었다. 가슴에 비수를 꽂듯 애절하고 터질 듯한 가창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무책임한 방랑벽으로 자신의 음악재질을 탕진했던 가요계의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최근 저혈당으로 쓰러져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초췌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한 그는 한국전쟁이 빚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음악영웅이기도 하다.

본명이 백병종인 박인수는 1947년 9월 3일 평북 길주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이북에 부친과 형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함께 남하했다.

하지만 전북 정읍의 열차 안에서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7세 때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부친은 일본에서 건축 설계를 전공해 중앙청 설계에 참여했던 유명한 건축업자로 대중음악에 관심이 지대해 섹서폰 클라리넷 기타 장구 거문고 등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고 창도 구성지게 잘 불렀다.

부친의 음악성을 이어받은 어린 박인수는 한번들은 노래는 바로 부를 수 있었기에 기차 안에서 실향민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트로트를 불러 연명했다.

그 후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다 문산 미24사단을 거쳐 전라도 고창으로 내려가 초등학교를 다니다 춘천 미군 비행장으로 옮겨 춘천초등학교를 2년 간 다니는 방랑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 후암동 미8군으로 올라와 삼광초등학교 4학년 때 미8군 어린이 교육봉사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토마스 엔드류 영의 눈에 들어 1960년 12세 때 미국켄터키 루이스빌로 입양되어 갔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거주하는 할렘에서 접한 리듬앤블루스나 솔 리듬은 외톨박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박인수는 “당시 샘 쿡, 레이 찰스등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스타이벌스 중학교를 마치기도 전 ‘김치를 먹는다’고 핀잔을 주는 양부모와의 불화가 심해져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1962년 홀로 귀국했다”고 말했다.

귀국한 그는 미8군내 학교를 다녔지만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의 음악감상실을 쏘다니느라 끝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후 박인수는 틈틈이 배운 팝송 레퍼토리와 미국에서 몸에 밴 흑인들의 리듬감으로 1965년 대영프로덕션의 오디션에서 A등급을 받고 8군 무대에 데뷔해 고 최용환이 리더였던 미8군 하우스밴드 코끼리브라더스에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흑인 특유의 한에 찬 노래들을 기막히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으로 화양, 유니버샬, 대영 등 미8군의 쇼프로덕션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키보이스, 샤우터즈, 데블즈, 바보즈 등 수많은 미8군 밴드들의 객원가수로 활동했다.

이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박인수는 일반무대와 미8군 여군들의 스타로 떠오르며 라이브무대의 황제로 통했다. 소문을 들은 신중현은 1967년 박인수를 찾아와 음악인연을 맺었다.

신중현은 “박인수는 영어 발음이 좋고 손을 비비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노래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966년 ‘키보이스’와 함께 청계천 3가 센츄럴 호텔 나이트클럽에 진출한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청계천 3가 맘모스 나이트클럽, 타워 나이트클럽, 미도파 살롱 등 에서 활동하며 일반무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대학생 등 젊은 층과 살롱에 몰래 들어온 고등학생들이 그의 음악에 특히 열광했다.

첫 음반녹음은 1969년 여대생 듀엣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 취입 때 백 코러스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70년에 결성된 신중현 그룹 퀘션스의 데뷔앨범에 취입한 봄비가 대히트를 하면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거머쥐었다.

신중현곡 봄비는 1969년 그룹 덩키스의 보컬 이정화가 차분한 보컬로 먼저 노래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곡을 여러 가수에게 취입시켰던 신중현은 폭발적인 솔 창법으로 노래하는 박인수에게 봄비를 부르게 해보았다. 적중했다.

당시 대중들은 “이정화는 봄비고 박인수는 소낙비”라며 다이나믹한 박인수의 봄비에 열광했다. 박인수는 “아이고 세상에. 여대생들이 한 두명 따라 다닌 게 아니야. 밤새도록 집으로 전화하고 찾아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당시의 인기를 전해준다.

1972년 결혼해 후암동에 거주한 박인수는 딸을 낳으며 처음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그는 소울과 사이키델릭 등 새로운 양식의 음악을 이 땅에 수혈하는 음악전도사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인수는 “한대수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60년대 말 무교동에서 한대수의 통기타 반주에 맞추어 함께 노래를 하곤 했다”고 비화를 전해준다. 그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음악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정작 자신도 “공부가 부족해 창법에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탄한다. 1975년 가요계의 대마초 파동은 박인수의 인생에 거대한 먹구름을 몰고 왔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10/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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